영웅은 멋있다. 보자기를 어깨에 두르고 슈퍼맨과 배트맨을 외치던 나이는 지났지만, 여전히 영웅을 좋아한다. 2008년 ‘아이언맨’이 처음 개봉한 후 10년 넘게 초록 괴물과 거미 청년, 망치 근육 신, 흑인 히어로, 우주 최강 여성 등 인종, 성별까지 초월한 영웅을 보며 열광했다.
다만 영웅은 스크린 안에 있을 때만 좋다. 현실 속 영웅담을 들을 땐 속이 쓰리다. 영웅은 모두 나가떨어졌을 때도 쓰러지지 않고 사회와 국가를 구해야 한다. 무너진 시스템 속에서 영웅만 홀로 빛난다. 자신의 피와 땀을 희생하는 건 당연하다. 구조와 국가가 구성원을 지켜주지 못할 때 평범한 사람들은 겨우 버티며 ‘영웅’이 돼야 한다.
수개월 간 가족을 보지 못했다는 20대 공항 검역관도, 딸의 생일에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선물만 집 문고리에 걸어뒀다던 군의관도 영웅이었다. 최근엔 코로나19 3차 유행으로 일일 확진자가 1000명이 넘고 병상이 모자라 대기 중에 사망하는 상황을 보다 못해 병원을 통째로 내놓은 의사도 있었다. 여름에 움직이기도 힘든 레벨D 방호복을 입고 더위에 탈진 돼 쓰러졌던 방역 인력들은 한겨울 손난로에 의지해 부르튼 손으로 현장을 지키고 있다.
지난 7월, 영웅들은 청와대 앞에 모여 “영웅, 천사라는 수식어는 필요 없습니다. 사람으로 대우해 주세요”라며 도움을 호소했다. 의료 인력 부족을 해결하고 업무 환경을 개선해 달라고 꾸준히 주장했다. 영웅의 도움 요청은 아직 이어지고 있지만, 상황은 더 악화하고 있다. 코로나19 환자를 전담 치료해온 지역의 몇몇 병원은 약속받았던 지원을 다 받지 못한 채 오히려 경영난에 허덕인다. 하루 평균 확진자는 계속 늘고, 백신 접종 소식은 아직 멀기만 하다. 병상은 여전히 부족하다.
영화가 끝날 때쯤 영웅은 운이 좋으면 상처투성이였고, 운이 나쁘면 죽었다. 토니 스타크도 우주를 구하고 세상을 떠났다. 현실 속 영웅의 새드 엔딩은 보고 싶지 않다. 내년에는 영웅으로 버틴 사람들이 평범한 일상에서 행복할 수 있길 바란다.
이태윤 복지행정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