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54〉
장쭤린은 작은 군벌로 출발했다. 소련과 일본이라는 두 강국의 압력을 극복하며 최강의 육·해·공군 수십만을 양성했다. 때론 거칠고, 난폭하고, 꼴 보기 싫은 문인과 지식인처럼 외세를 대했지만 적절히 활용할 줄도 알았다. 양국이 탐내는 철도 부설과 광산 채굴권을 미끼로 묘하게 처신했다.
작은 군벌서 수십만 군대 수장 돼
소련·일본의 압력 속 영토 방어
“동북 출신 군사 전문가 물색하라”
최측근 왕융장에게 은밀히 지시
국제 무기시장 밝은 한린춘 통해
무기·제조 장비 닥치는 대로 구매
토지만은 예외였다. 일화 한 편을 소개한다. 일본인들은 중국 명사들의 글씨 받기를 좋아했다. 펑톈을 방문한 일본 외교관이 장쭤린에게 붓글씨를 청했다. 장쭤린은 호랑이 ‘호(虎)’자와 ‘張作霖黑’을 일필휘지했다. 놀란 측근이 장쭤린의 귀에 입을 댔다. “墨이 맞습니다. 흙 토(土)가 빠졌습니다.” 장쭤린은 씩 웃으며 말을 받았다. “내가 아무리 무식해도 그 정도는 구분할 줄 안다. 호랑이는 동북 산속에 널려있다. 원숭이들에게 한 마리쯤 줘도 아깝지 않다. 땅은 육신(肉身)이나 마찬가지다. 촌토(寸土)도 줄 수 없다. 그래서 빼버렸다.”
1922년, 1차 즈펑(直奉)전쟁이 벌어졌다. 장쭤린이 지휘하는 펑파는 우페이푸(吳佩孚·오패부)의 즈파군에게 패했다. 펑톈으로 돌아온 장쭤린은 우페이푸의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떨었다. 세 번 암살을 기도했다. 실패하자 생각을 바꿨다. 참모들에게 참패 소감을 털어놨다.
장쭤린은 최측근으로 자리 잡은 왕융장(王永江·왕영강)에게 은밀히 지시했다. “전국에 흩어져있는 동북 출신 중에 군사 전문가를 물색해라.” 왕융장은 무슨 일이건 대책이 준비된 사람이었다. 한린춘(韓麟春·한린춘)을 천거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포병과를 졸업했다. 주미 무관으로 워싱턴에 있다. 술은 입에도 안 대고 여자라면 질색이다. 도박을 즐긴다는 소문이 있다.”
장쭤린은 무릎을 쳤다. “도박은 흠이 아니다. 인생은 어차피 도박이다. 전쟁은 특히 그렇다. 우리 모두 도박꾼이지 뭐냐. 당장 귀국을 종용해라. 그간 나는 숫자만 많으면 강군이라고 생각했다. 정병주의(精兵主義)에 치중할 생각이다. 동북강무당의 시설을 확충하고 일류 교관들을 초빙해라. 제 이름도 쓸 줄 모르는 군관들은 도태시켜라. 문제는 글줄은 알아도 말만 잘하는 무능한 놈들이다. 공기 좋은 곳에 가서 돼지나 키우라고 권해라.”
교육 중시하자 각 분야 인재들 물려 와
한린춘은 빼어난 무기 전문가였다. 국제 무기시장 사정에도 밝았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전승국들은 패전국 독일을 철저히 짓밟았다. 독일의 세계적인 군수산업체 크루프병공창도 해체했다. 독일은 군벌 전쟁으로 날을 지새우는 중국을 주목했다. 잉여 무기를 팔기 위해 중개업자들을 상하이에 파견했다. 한린춘은 장쭤린이 준 무기 구입 자금을 들고 상하이로 갔다.
도박장 불빛이 한린춘을 유혹했다. 알거지까지 갔지만 이왕 갔으니 도박이나 실컷 하고 오라며 장쭤린이 더 보내준 돈이 2배(일설에는 4배)로 늘어나자 손을 털었다. 도박장에서 딴 돈으로 무기와 제조 장비를 닥치는 대로 구입했다. 동양 최대규모의 동북병공창 설립은 장쭤린의 혜안과, 무기천재 한린춘의 도박실력이 아니면 어림도 없었다.
장쭤린과 한린춘은 동북병공창에서 만든 엄청난 양의 무기들이 훗날 엉뚱한 곳에 쓰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