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호 전투 70주년, 한국인 생존용사 인터뷰
가장 참혹하고 처절한 전투로 기록
“후퇴 아니라 방향 바꿔 공격한 것”
중공군에 궤멸적 피해 안김으로써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구한 승리
하지만 그의 예상은 오산이었다. 갑작스레 장진호 쪽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중공군에 포위돼 고립되어 있던 해병 1사단을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해병 1사단이 포위된 것은 중공군의 유인전술에 휘말린 결과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군 지휘부는 대규모의 중공군이 한반도에 주둔해 와 있는 것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장진호에 동원된 중공군 9병단은 12만명, 여기에 맞서는 미군은 해병대와 보병을 합쳐 3만명으로 중과부적이었다. 장 씨가 속한 31연대는 황초령과 고토리를 통해 장진호로 들어가 열흘 남짓 악전고투를 치렀다.
“해가 지고 밤이 되는 게 두려웠다. 중공군은 낮에 산속에 숨어있다가 밤만 되면 나팔소리, 피리 소리와 함께 기습을 해왔다. 말그대로 벌떼처럼 새까맣게 달려들어 백병전이 펼쳐졌다. 낮에 제공권을 장악한 미군이 그렇게 폭격을 해도 중공군은 밤만 되면 나타났다.”
소총 용수철이 얼어 사격이 제대로 안될 정도였고 손이 총신에 그대로 달라붙어 조준이 힘들었다. 수류탄 안전핀도 제대로 뽑히지 않았다. 많은 병사들이 장염에 시달렸다고 미군 전사는 기록하고 있다. 전투 식량을 얼음 상태로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연대장이 전사한 것을 비롯해 열흘 남짓 버티는 동안 많은 전우를 잃었다”고 장 씨는 회고했다. 철수 명령을 받은 그의 부대는 전투를 치러가며 장진호에서 120㎞ 떨어진 흥남에 도착한 뒤 배를 타고 묵호로 빠져나왔다. 국군 수도사단 포병에 전속된 그는 휴전 직전까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인 금성지구 전투에 참전했다. 아군이 전멸하고 혼자 중공군 적진에 남게 돼 열흘동안 빗물을 받아마시며 버티다 탈출에 성공하는 등 생사의 기로를 숱하게 넘나들었다. 인천상륙에서부터 장진호 전투를 거쳐 금성전투까지 거치며 불사조처럼 살아 남은 그의 개인 이력은 6·25 전사(戰史) 그 자체였다.
미군 통역장교로 해병 1사단에서 복무하다 장진호 전투의 처음부터 끝까지 치른 한국인도 있다. ‘존 리’란 이름으로 미 해병대 전사에도 등장하는 이종연 변호사가 그 주인공이다. 지난해부터 미국에 체류중인 그와는 국제전화로 인터뷰를 했다.
그는 한국인 카투사 50명을 지휘해 무사히 철수시킨 공적이 있다. “장진호를 넘어와 우리 해병대와 합류한 보병사단 병력중에 카투사 100명 정도가 있었다. 나머지 카투사는 다 전사한 것 같았다. 그중에서 50명을 나에게 예속시켜줬는데 철수 도중 전투가 계속되는 와중에서도 병력 손실 없이 흥남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장진호 전투는 6·25 전쟁 전체의 물줄기를 가르는 분수령이었다. 유엔군은 인해전술과 혹한이란 철옹성에 막혀 북진을 중단하고 남하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전쟁 사가들은 이를 ‘위대한 후퇴’라고 기록한다. 하지만 이 변호사의 생각은 달랐다. “미군이 유인 전술에 휘말려 포위당하고 철수를 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이다. 하지만 중공군에 5만명 사상자를 내는 궤멸적 피해를 입혔다. 올리버 스미스 사단장의 말처럼 우리는 후퇴를 한 것이 아니라 공격을 한 것이다. 다만 공격의 방향을 바꾼 것 뿐이다.”
이 변호사의 평가는 이랬다. “미군이 북진을 중단한 결과만 놓고 본다면 ‘항미원조’를 내걸고 참전한 중국이 뜻을 이룬 것으로 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건 전쟁의 일면을 본 것일 뿐이다. 미군이 장진호에서 물러났음에도 불구하고 9병단은 그 뒤 6개월간 남하해 오지 못했다. 궤멸적 타격을 입고 회복하는 데 그만큼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만약 그랬지 않았더라면, 대구까지 밀리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만약 그랬다면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지금 남아있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장진호에서 숨져간 용사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선 장진호에서 살아돌아온 소수의 생존 용사들을 초신 퓨(Chosin Few)라 부른다. 이 변호사도 설립 발기인으로 참여한 가운데 1980년 정식 사단법인이 결성돼 미 정부에 등록이 되어 있다. 초신은 장진의 일본어 발음이다. 당시 미군이 일본어 지도를 기반으로 작전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명명된 것이 지금도 이어져 오는 것이다. 미 해병대의 정예 이지스함 중에도 초신함으로 명명된 함정이 있다. 장진호 전투를 결코 잊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셈이다.
장진호 전투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흥남철수다. 미군이 철수할 때 10만여명의 북한 피난민이 자유를 찾아 함께 남하했다. 탱크와 대포를 내려놓고 피난민 1만4000명을 태워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거제도에 도착한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이야기는 영화 ‘국제시장’을 통해서도 잘 알려져 있다. 그 속에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도 타고 있었다. 이 배 위에서 5명의 신생아가 태어나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중 한 사람인 이경필(69) 장승포 가축병원장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장진호 전투와 내 나이가 똑같습니다. 장진호 전투의 영웅들은 나에게 생명을 주었습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생면부지의 땅에서 동사(凍死)를 무릅쓰고 싸운 그들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우리나라는 또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결코 잊어선 안 되는 게 장진호 전투입니다.”
장진호 70주년을 맞은 올해는 정부 주관의 추모 행사와 별개로 민간에서도 기념사업회(회장 이재춘 전 주러시아 대사)를 꾸렸다. 장진호 전투가 막을 내린 11일 인천 자유공원에서 기념행사를 갖고 13일에는 거제도에서도 조촐한 기념회를 열기로 했다.
예영준 논설위원
yyjun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