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기 역사로 읽는 이광수의 『무정』
표류의 길은 바다였으나 귀환의 길은 중국이었다. 그것은 북경 너머의 중국을 견문하는 드문 기회를 의미했다. 명나라 성조가 남경에서 북경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조선의 사행 코스는 한양~북경으로 고착됐다. 고려 말기 정몽주나 조선 초기 이방원이 명나라 수도 남경에 사행을 다녀온 일, 또는 그 한참 전에 원나라 수도 대도의 만권당에서 글을 읽던 이제현이 사천 아미산에 유람을 다녀온 일, 비슷한 시기 충선왕이 원나라 황실의 권력 다툼에 휘말려 멀리 토번(티베트)에 유배된 일은 이미 까마득한 옛일이 돼 있었다. 북경 너머 열하에서 천하대세를 논한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그런 의미에서 문제작이었다.
개항 상해서 신서적 수십 종 구입
무기·철도·선박책 등 탐독했을 듯
격물치지가 나라 다스리는 근본
실학의 큰 틀로 근대 서학 반성을
북경 너머 떠오르는 중국의 새로운 중심은 상해였다. 이광수의 소설 『무정』에는 이런 장면이 있다. 주인공 형식의 스승이자 영채의 아버지인 평안도 안주의 박 진사는 홍경래의 난으로 멸문의 화를 당한 몰락한 가문 출신으로 일찍이 뜻한 바 있어 대략 1901년경 중국에 유람을 갔다. 그는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고 상해에서 신서적 수십 종을 사서 귀국한 다음 청년을 모아 사상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딸 영채를 학교에 보내 신학문을 배우게 하면서도 직접 집에서 『시경』을 가르쳐 신구 절충의 여성 교육에 힘썼다. 『무정』은 서둘러 박 진사를 파멸시키고 영채에게 고난의 운명을 부과한다. 왜 그랬을까. 『무정』의 한가지 독법이다.
박 진사가 고른 상해의 신서적은 무엇이었을까.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는 1888년 상해의 16개 서점에서 판매하는 서적 목록이 있다. 그가 한역 서학서를 좋아했다면 격치서실 판매 도서를 골랐을 것이다. 여기에는 강남제조총국·격치휘편관·익지서회 등의 책이 포함돼 있다. 강남제조총국은 청나라가 양무운동을 시작하면서 상해에 세운 무기공장이다. 총국은 번역관을 두고 영국 선교사 존 프라이어(傅蘭雅)를 고용해서 철·석탄·포·윤선 등 부국강병에 관한 서양 도서를 전략적으로 번역했는데 독일의 크루프포(砲)를 다룬 『극로백포설』도 이 중의 하나다. 크루프포는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진가를 발휘했고 이에 청나라는 북양 육군과 북양 해군을 크루프포로 무장시켰다.
박 진사는 어쩌면 프라이어가 발간한 과학잡지 ‘격치휘편’을 구매했을지도 모르겠다. ‘격치휘편’ 연재물은 서양의 과학기술과 관련된 첨예한 주제라서 조선 정부의 관심을 끌었는데, 프라이어가 영국 런던에 가서 부근의 공장을 취재하고 지었다는 ‘역람영국철창기략(歷覽英國鐵廠紀略)’은 1884년 한성순보에도 전재돼 이미 조선에 알려져 있었다. 조선의 연행 사절단은 1874년 북경에서 ‘격치휘편’의 전신인 ‘중서문견록’을 열독하거나 구매하면서 서양 지식과 시사 뉴스를 접하고 있었으니 ‘격치휘편’에 대한 관심도 이 시기로 소급될 수 있겠다. 독립협회가 발간한 ‘대조선독립협회회보’ 제3호(1896.12.31)는 상해에서 저렴하게 ‘격치휘편’ 전질을 구매하기를 권하였다.
독립협회서 과학잡지 구독 권하기도
북경 너머의 중국이 조선에 열렸을 때 그 중심지 상해는 근대 서학을 한문으로 풀이해 전파하는 번역의 메카였다. 중국과 조선이 공유한 전근대 유학은 근대 서학을 만나 ‘실학’이라는 근대 패러다임으로 자신의 학문 전통을 반성했다. 실학이란 부재 또는 결핍을 자각하도록 인도하는 개념이었다. 이제 근대 서학에도 진지하게 되묻고 싶다. 근대 서학의 격물치지는 실학이었는가. 실학이었다면 왜 아직도 이 지구에서 치국평천하를 보지 못하는가. 실학이란 용어를 이제 근대 서학의 반성에 관한 개념으로도 치열하게 사용하기를 제안한다. 북경 너머에서 유럽 너머로, 표류의 길에서 귀환의 길로, 역사는 그렇게 흐른다.
춘원이 부러워한 중국의 영어학습서
『무정』의 박 진사가 만약 상해에서 책 구경을 했다면 점석재서국에서 판매하는 각종 화보와 비첩, 지도에도 마음이 끌렸을 것이다.
근대 상해의 도시 풍경과 생활 풍속을 담은 ‘신강승경도(申江勝景圖)’를 보았다면 기념품 삼아 샀을지도 모른다. 점석재는 1884년 『고금도서집성』을 납활자로 인쇄해 대중적인 보급을 시도했는데 물론 박 진사가 이를 구매할 처지는 아니었다. 현재 본래의 희소한 구리활자본은 규장각에, 근대의 대중적인 납활자본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만약 박 진사가 영어 공부에 관심이 있었다면 1897년 설립된 상무인서관의 영어 학습서 『화영초계(華英初階)』 『화영진계(華英進階)』를 구입했을 수도 있다. 인도인의 영어 학습서에 중국어 설명을 붙인 교재로, 출간 열흘 만에 초판 2000부가 매진될 정도였다. 이 밖에도 신교육 교과서, 『사원(辭源)』 같은 사전, 『사부총간(四部叢刊)』 등을 망라했다. 춘원 이광수는 조선에도 이런 기관 하나 있으면 하고 부러워했다.
근대 상해의 도시 풍경과 생활 풍속을 담은 ‘신강승경도(申江勝景圖)’를 보았다면 기념품 삼아 샀을지도 모른다. 점석재는 1884년 『고금도서집성』을 납활자로 인쇄해 대중적인 보급을 시도했는데 물론 박 진사가 이를 구매할 처지는 아니었다. 현재 본래의 희소한 구리활자본은 규장각에, 근대의 대중적인 납활자본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만약 박 진사가 영어 공부에 관심이 있었다면 1897년 설립된 상무인서관의 영어 학습서 『화영초계(華英初階)』 『화영진계(華英進階)』를 구입했을 수도 있다. 인도인의 영어 학습서에 중국어 설명을 붙인 교재로, 출간 열흘 만에 초판 2000부가 매진될 정도였다. 이 밖에도 신교육 교과서, 『사원(辭源)』 같은 사전, 『사부총간(四部叢刊)』 등을 망라했다. 춘원 이광수는 조선에도 이런 기관 하나 있으면 하고 부러워했다.
노관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