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인사이드]인천상륙작전은 성공했지만…맥아더 고집에 헛고생

중앙일보

입력 2020.11.2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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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에서 기뢰를 제거하던 중 폭발하는 한국 해군 소해정(YMS-516). 이처럼 방어물에 가로막혀 미 10군단의 상륙은 차일피일 지연됐다. [Wikipedia]

 
1950년 9월 15일 단행된 인천상륙작전의 결과는 실로 엄청났다. 순식간 전세를 역전시켰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모두의 반대를 물리치고 고집스럽게 작전을 주도한 맥아더의 명성은 이후 6·25전쟁사에 뚜렷이 각인됐다. 
 
그런데 이때부터 이듬해 해임 전까지 그는 계속해서 실망스러운 모습만 보여주었다. 우선 인천항에서 40여㎞ 떨어진 서울을 탈환하는데 보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는 점은 생각해 볼 부분이 많다.
 

맥아더와 참모들

 
미 10군단의 모든 부대가 상륙하는데 열흘 정도가 필요했으나 가장 먼저 투입된 미 해병 제1사단의 전투력이 당시 경인 지역에 산재한 공산군보다 앞선 상태였다. 그런데도 진격은 더뎠고 맥아더도 특별히 채근하지 않았다. 
 
이점은 낯선 곳에서 작전을 펼쳐야 하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더 큰 패착이 곧바로 이어졌다. 바로 무의미한 실패로 기록된 원산 상륙작전이다.


북진의 목적으로 다시 상륙을 선택한 것이 잘못이라 할 수 없지만 한참 앞으로 나가던 미 10군단을 인천으로 회군시켜 배에 태운 뒤 한반도를 한 바퀴 돌아 원산으로 보낸 것은 한마디로 패착이었다. 
 

서울 도심에서 저항하던 북한군을 생포한 모습. 그런데 인천 상륙부터 서울 탈환까지 보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는 것은 생각해 볼 부분이 많다. [Wikipedia]

 
당시 전선의 상황을 살펴보면 미 10군단이 의정부 북부, 국군 2군단이 충주, 국군 1군단이 삼척까지 도달한 상태였지만 문제는 미 1군단이었다. 당시 미 8군의 선봉대였던 미 1군단은 경기도 안성까지만 북상한 상태였다.
 
그 때문에 굳이 원산 상륙을 강행한다면 미 8군 예하 중 부산에 가까이 위치했던 부대를 차출해 보내고 10군단은 그냥 평양을 향해 진격하는 것이 순리적이었다.
 

맥아더, 인천상륙 성공 뒤 원산상륙 노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그해 11월까지 전황도. 상륙작전 이후 두 달만에 11월 24일 청진까지 진격하게 된다.

 
하지만 경험을 중시한 맥아더가 미 10군단을 원산에 상륙할 부대로 낙점한 이상 미 1군단이 하루빨리 38선 부근까지 올라와 미 10군단과 자리를 바꿔야 했다. 결국 미 1군단이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미 10군단이 회군하자 북진은 순식간 탄력을 잃었다.
 
당시에 전쟁을 지휘하던 이들도 문제점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가장 앞에 있던 부대를 선봉에 세운다는 건 극히 단순하지만 명쾌한 해법이었다.
 
워커 미 8군 사령관은 미 10군단이 그냥 평양으로, 국군 2군단이 미 10군단의 우측을 담당하여 한반도 중앙으로, 동부전선은 가장 앞에 서 있던 국군 1군단이 동해축선을 따라 올라가고 미 1군단은 서울을 거쳐 경원가도를 따라 원산으로 향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한국전쟁 초기 미 8군을 이끈 워커는 미 10군단의 원산 상륙을 반대했다. 하지만 맥아더의 권위에 눌려 의지를 관철할 수 없었다. [Wikipedia]

 
따라서 워커처럼 많은 이들이 상륙작전보다 육상으로의 진격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켰던 해군의 반대가 컸는데, 당시 미 극동군 해군사령관 조이(Turner Joy) 제독의 주장을 살펴보면 모든 것이 설명될 수 있을 정도다.
 
“미 10군단이 해상으로 돌아 원산으로 이동하는 것보다 지상으로 이동하기가 더 쉽고 시간도 단축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해군에서는 누구도 이런 작전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사람이 없다. 차라리 상륙작전을 벌인다면 인천에서 쉽게 연계할 수 있고 평양이 가까운 서해안의 진남포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좋다” 
 

워커, 원산은 시간과 비용 많이 들어 효과 없어 

 
한마디로 원산상륙은 시간도 비용도 많이 들고 효과도 없을 것이라는 부정적인 의견이었다.
 
반면 일부지만 육군에서 상륙작전을 지지하는 이들도 있었다. 한마디로 한반도에서 마주한 지형에 질렸기 때문이었다. 한반도는 불과 미국의 플로리다만 한 크기지만 전장은 쉽지 않았다. 
 
한국에 도착해 보니 거친 산악이 이어지고 지도에는 도로가 표시되어 있지만, 오솔길인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작전을 펼치기 어려웠다. 여름에 참전한 그들이 지금까지 경험한 유일한 평지인 논밭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독일군을 질리게 한 러시아의 진흙 장군과 맞먹었다.


미 10군단이 기뢰에 막혀 바다 위를 떠돌고 있을 때 국군 1군단이 10월 10일 원산을 탈환했다. 결국 원산 상륙을 군사적으로 무의미했던 패착이 됐다. [Wikipedia]

 
유일한 교통로라 할 수 있는 철도는 곳곳이 파괴되어서 중장비 이동이 어려웠다. 그래서 미 10군단장 알몬드(Edward Almond)는 “원산까지 육로로 진격하는 것을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실행 전부터 많은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인천상륙작전 당시처럼 맥아더의 의지를 꺾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그 결과 작전은 강행되었지만, 미 10군단을 실은 함정들은 원산항 인근에 설치된 기뢰에 막혔다.
  
일본에서 동원한 소해정까지 투입해 기뢰를 제거하는 동안 미 10군단은 영흥만과 울릉도 사이 해상을 왕복하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결국 동해안을 따라 북상한 국군 1군단이 원산을 점령한 뒤 10월 14일에서야 상륙함으로써 작전은 실패로 막을 내렸다. 
 
상륙작전 때문에 귀중한 전력을 보름 가까이 사용하지 못한 여파는 컸다. 북진이 실패로 끝난 이유는 많지만 이처럼 최고 지휘관의 고집과 이를 막을 수 없었던 시스템도 크게 한몫했다. 아쉬울 뿐이다.
 
남도현 군사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