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풍수가 소백산을 사람을 살리는 산이라 했던가. 난을 피해 살 수 있다는 십승지(十勝地)가 산자락 어디에 숨어있다고 했던가. 퇴계마저 이 계곡에 들어와 성리학의 이상향을 꿈꿨었다. 산에 들면 정말 병든 심신을 일으킬 수 있을까.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맵고 달았다. 날이 차서인지 새는 울지 않았고, 젖은 낙엽 밟는 소리가 서걱 거리며 따라왔다.
영주 죽계구곡 트레킹
소백산자락길 1자락 계곡 길
굽이굽이 절경에 유림의 자취
인적 없는 숲에서 홀로 힐링도
소백산은 산이 커 길도 많다. 마루금 따라 이어진 주 탐방로 말고도 명승으로 지정된 죽령 옛길, 고치령길·마구령길 같은 험한 고갯길도 여럿 있다. 소백산을 한 바퀴 두르는 소백산자락길도 있다. 2009년 영주문화연구회가 조성을 시작한 소백산자락길은 전체 143㎞에 이르는 대형 트레일이다. 12개 코스로 나뉘는데, 소백산자락길은 각 코스를 ‘자락’이라 부른다.
구곡(九曲)은 유교 문화의 하나다. 성리학 시조 주자(1130∼1200)가 중국 푸젠(福建)성 무이산의 아홉 계곡을 ‘무이구곡’이라 이르고 시를 지어 ‘무이구곡가’라 했다. 조선의 성리학자들도 주자를 본 따 구곡을 재현했고 구곡마다 시를 지었다. 국어 시간에 배웠던 율곡 이이의 ‘고산구곡가’와 퇴계 이황의 ‘도산십이곡’이 바로 구곡 문화의 대표 작품이다. 조선 시대에만 150곳이 넘는 구곡이 있었단다.
퇴계는 고향 땅 도산에서 ‘도산십이곡’을 지었고, 풍기 군수 시절에는 영주의 죽계구곡을 경영했다. ‘도산십이곡’은 원문이 남았지만, 죽계구곡은 전해오지 않는다. 다른 유림의 죽계구곡가는 여러 편 내려오나 퇴계의 죽계구곡은 기록만 있다. 그래도 무연히 걸을 뿐이다. ‘가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가고 어쩌겠는가(‘도산십이곡’ 부분).’
길은 죽계를 거슬러 오른다. 다만 구곡 표시가 혼란스럽다. 퇴계는 흔적을 남기지 않았으나, 곡을 이루는 바위마다 글자가 새겨져 있다. 1728년 순흥부사로 부임한 신필하의 것이다. 영조 연간에 편찬된 ‘순흥지’는 신필하의 구곡이 신재나 퇴계의 구곡과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신필하는 상류에서 내려오며 구곡을 매겼는데, 본래 구곡은 하류에서 올라가며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영주문화연구회 배용호(69) 이사는 “다른 구곡은 한 명이 경영해 논란이 없는데 죽계구곡은 여러 기록이 전해와 헷갈린다”고 말했다. 중앙일보는 ‘순흥지’의 표기를 따른다. 하여 길에 표시된 곡과 순서가 다르다.
이를테면 5곡 목욕담은 이름처럼 목욕을 할 만한 소(沼) 여러 개가 들어앉아 있다. 큰 것은 여남은 명이 들어가도 넉넉해 보인다. 다시 계곡을 오르니 폭포가 나타나고(7곡 용추), 널찍한 바위 위로 맑은 물이 흐르고(8곡 금당반석), 두 계곡물이 하나로 만난다(9곡 중봉합류). 하나같이 절경이다. 곡이 아니어도 굽이굽이 계곡은 눈길과 발길을 붙든다. 9곡에서 죽계구곡은 끝나고, 더 깊고 더 높은 산으로 들어가는 숲길이 이어진다.
옛 선비가 구곡을 찾아 소백산을 오른 건 자신을 다스리기 위해서였다. 무지렁이 백성은 제 목숨을 지키려고 소백산에 숨어들었다. 이 심란한 시절 소백산 안으로 들어온 건, 그저 가는 계절이 아쉬워서였다고 하자. 이 계절을 무어라 부르든 간에 이즈음의 산은 편안하다. 맨살 드러낸 나무가 우리네 사는 꼴처럼 앙상해서다. 아무도 없는 산에서 양껏 숨을 쉬다 내려왔다.
글·사진=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