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안혜리 논설위원이 간다

[안혜리 논설위원이 간다] 내 방 30만원짜리 서랍장, 알고 보면 830만원?

중앙일보

입력 2020.11.26 00:39

수정 2020.11.26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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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집값, 공간 다이어트 열풍을 불러오다 

3400만원짜리 더블 침대, 830만원 나가는 서랍장, 1800만원 하는 양문형 냉장고, 여기에 5000만원 넘는 옷방까지…. 풍문으로만 듣던 재벌 집이나 고소득 전문직이 사는 초호화 주택 인테리어 얘기가 아니다. 서울 아파트에 사는 장삼이사들이 평균적으로 이렇게 산다. 좁은 공간, 없는 살림에 싼 거 사서 촘촘히 수납하고 아껴 쓴다고만 생각했는데 실은 이렇게 큰 비용을 치르며 살고 있다. 발품 팔고 온라인 뒤져서 무료 배송 조건으로 200만원이 채 안 되는 최저가 냉장고를 사고, 배달·조립 비용까지 다 포함해도 30만원대에 불과한 서랍장 하나 장만해서 뿌듯해했는데 이게 무슨 헛소리냐고? 여기 당신이 간과했던 사실이 하나 있다. 공간이 바로 돈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상식 말이다. 어쩔 수 없이 견뎌내야 하는 부동산값 폭등 시대를 합리적으로 건너는 방법을 공간 관점에서 찾아봤다.
  
싼 가구의 비싼 배신

서울 평당 매매가 3200만원 돌파
큰 평수 이사 좌절 시대, ‘공간=돈’
물건에 내준 주인자리 되찾으려
내몸 지방 빼듯 버리기·정리 바람

우리집 가구, 이렇게 비싸다

“와, 싸다. 이렇게 큰 서랍장 하나가 20만원밖에 안 하네.”
 
코로나19 와중에도 평일 고양 이케아는 사람들로 붐볐다. 원룸에서부터 4인 가구에 이르기까지 세대원 수에 맞춰 쇼룸처럼 꾸며놓은 매장을 보면서 다들 패스트 패션처럼 가성비 좋아 쉽게 사고 버릴 수 있는 패스트 가구(FMCG·Fast-Moving Consumer Goods)를 집에 들여놓을 생각에 들뜬 얼굴들이었다. 그런데 건축사무소에서 일했던 경험을 토대로 『침대는 거실에 둘게요』를 쓴 서윤영 건축 칼럼니스트는 이런 소박한 소비에 찬물을 확 끼얹는다. “가령 1.5m×2m짜리 더블 침대를 200만원에 합리적으로 잘 샀다고 생각하지만 대략 한평(3.3㎡)을 차지하고 있으니 3400만원이나 마찬가지예요. 침대값 200만원에 공간 점유 비용 3200만원을 더해서. 3년 만에 1200만원 더 올랐네요.”
 
너비 0.8m 깊이 0.6m인 한쪽짜리 1인용 옷장 하나는 문 여닫는 클리어런스 공간까지 따지면 가격이 800만원에서 시작한다. 반 평 정도의 공간이 필요한 양문형 냉장고는 최소 1600만원짜리다.


크게 오른 서울 아파트값

서 칼럼니스트가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공간 점유 면적이다. 서울 아파트 평당 가격이 문재인 정부 초기인 2017년 2000만원에서 크게 올라 2020년 9월 현재 3200만원이 됐으니(부동산114) 침대 하나가 한 평을 차지하고 있다면 그때보다 1200만원 더 비싼 3200만원만큼의 비용이 포함돼 있다는 얘기다. 강남의 ‘똘똘한 한 채’는 말할 것도 없고 평당 아파트값이 가장 낮은 것으로 조사된 중랑구에 살고 있어도 1740만원(평당 매매가격)을 온전히 침대에 내주고 있는 셈이다. 경실련 조사(서울 22개 단지)대로라면 더 비싸다. 문재인 정부 출범 당시인 2017년 평당 2625만원에서 현재 4156만원으로 껑충 뛰었으니 말이다.
 
내 집 아닌 전세 사는 사람이 치러야 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서울 아파트 전세가는 지난 10월 평당 2040만원으로, 사상 첫 2000만원 시대를 열었다. 34평(112.2㎡) 전셋집에 이사해 한 평 반(4.9㎡)짜리 작은 방 하나를 옷방(워크인 클로짓)으로 꾸민다고 가정해보면 2012년(평당 평균 855만원)엔 1280만원이면 가능했지만 이젠 최소 3060만원을 옷을 위한 공간으로 투자해야 한다. 같은 평수, 심지어 더 좁은 집인데도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전셋값이 껑충 뛰었다면 예쁘게 꾸미고 싶어서가 아니라 좁은 집에서 넓게 살기 위해서라도 공간 다이어트를 할 수밖에 없다. 과거에 없던, 공간 점유 면적을 감안한 비용 계산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집 아끼면 당장 1억 버는 효과
 

정희숙

유명 연예인들의 집 정리로 이름을 알린 정희숙 정리 컨설턴트는 “재택근무용 책상 하나 추가로 놓을 공간이 없는데 부동산값이 크게 올라 넓은 집 이사는 꿈도 못 꾸고, 큰돈 드는 리모델링은 겁이 나서 막막하고. 그러다 보니 기존의 공간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며 “과거엔 같은 공간에 어떻게 하면 좀 더 많은 걸 넣을 수 있느냐를 궁리했다면 최근엔 이런 가구나 물건이 차지하는 면적을 가급적 줄여 사람이 실제로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 트렌드의 배경이 코로나와 집값, 크게 두 가지라는 설명이다.
 
실제로 코로나 이후 재택근무와 사회적 거리두기 등의 여파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온 식구가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집 꾸미기가 대세로 떠올랐다. 여기에다 지난 8월 임대차 3법 도입을 계기로 서울 아파트 매매는 물론 전·월세 가격이 폭등하면서 ‘공간=돈’으로 환산해 공간을 아끼는 공간 다이어트에 대한 관심까지 더해졌다. 지난 몇 년 동안 집 정리 트렌드가 수납에서 버리기를 통한 미니멀 라이프로 서서히 넘어왔다면, 고삐 풀린 부동산값에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 대출마저 꽉 막혀 평수 넓혀 이사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해진 지금은 비싼 집 아껴 쓰기, 다시 말해 같은 집을 넓게 쓰는 공간 확보가 대세다.
 
서윤영 칼럼니스트는 “지금은 돈과 시간은 물론 하다못해 감정 소모까지 아끼고 줄이려고 신경을 쓰는 세상인데 이상하게 공간만큼은 아껴 쓴다는 개념이 부족하다”며 “수납이라는 이름으로 물건에 공간을 다 내주고 정작 집주인은 불편하고 좁게 쓰는 건 난센스”라고 말했다. 그는 또 “모델이 일반인과 달리 군살(지방) 없는 탄탄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어 보기가 좋은 것처럼 모델하우스 역시 불필요한 지방(수납)이 없어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이라며 “몸에 지방을 빼는 것처럼 집도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수납가구를 둔다는 자체가 그 공간을 사람이 아닌 물건이 점유하고 있다는 걸 명심하란 얘기다.
 
불필요한 물건을 버린 후 그걸 담고 있던 수납가구를 덜어낸다든지, 아니면 바꿀 때가 된 오래된 가구나 가전을 새로 살 때 크기가 작은 걸로 교체하는 식으로 가구가 차지하는 면적을 10%만 줄여도 34평짜리 집을 37평처럼 쓸 수 있다. 서울 아파트 평균 가격으로 환산하면 순식간에 1억원을 버는 효과다. 결코 불가능한 수치가 아니다.
 

이지영

업체들이 토탈 인테리어를 제안할 때 대략 집 공간의 절반을 가구로 배치한다. 정리하지 않고 짐을 오래 쌓아둔 집은 훨씬 더 많은 공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침대처럼 직접 몸을 위해 필요한 ‘신체 가구’는 어쩔 수 없다 해도 몇 년 동안 처박아 둔 옷이며 뭘 가졌는지 알지도 못하는 온갖 잡동사니를 수납하느라 들여놓은 ‘수납 가구’에 들어가는 비용은 그야말로 사람이 물건을 주인으로 모시느라 발생하는 불필요한 돈이나 마찬가지이고, 이것만 정리해도 드라마틱하게 공간이 변한다. 최근 화제를 모으고 있는 TV 예능 ‘신박한 정리’가 매회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 프로그램에 전문가로 참여하고 있는 이지영 공간 크리에이터는 “내가 정의하는 정리는 단순히 수납이 아니라 소비자의 마음을 읽는 것”이라며 “부동산으로 불안한 마음이 커질수록 정리에 대한 욕구도 분명 늘어난다”고 말했다. 정희숙 컨설턴트도 비슷한 얘기를 한다. “정리는 통제력 문제”라며 “부동산값은 내 맘대로 움직이지 않고, 집에선 주객이 전도돼 물건에 삶이 압도되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나름대로 찾은 탈출구”라는 것이다.
 
버리기 기술

곤도 마리에

최근 인테리어의 화두는 버리기다. 그 선두엔 일본을 넘어 세계적 지명도를 확보한 곤도 마리에가 있다.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는 슬로건으로 유명한 곤도 마리에는 “정리를 통해 인생에서 무엇이 필요한지 아닌지, 무엇을 해야 하고 그만두어야 하는지를 확실히 알게 되기 때문에 정리하면 인생이 바뀐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리 1순위로 옷을 꼽으면서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고 주문한다.
 
하지만 이런 방식이 한국과는 잘 맞지 않는다는 게 국내 정리 전문가들 주장이다. 정희숙 컨설턴트 역시 버리기를 중요하게 꼽는다. 하지만 그는 “설렘 여부는 우리와는 먼 얘기”라고 단언한다. 실제로 최근 첫 추위가 왔을 때 SNS엔 ‘곤도 마리에한테 속아 설레지 않는 패딩을 다 버렸더니 입을 게 없다’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정 컨설턴트는 “우린 4계절이 있어 원체 짐이 많다”며 “설레지 않아서 버리는 게 아니라 공간을 얻고자 불필요한 것을 버린다는 개념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밖에서 안으로,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장소가 아닌, 종류별 정리를 제안했다. 옷을 서랍이 아니라 걸어서 정리하는 방식도 유용하다. 흔히 많이 수납할 수 있어 서랍장을 선호하는데 옷을 많이 못 걸기 때문에 오히려 걸어서 관리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지영 대표는 현재의 나를 위해 “설레어도 버려라”라는 더 도발적인 주장을 한다. 또 “오래된 가구부터 버리는 게 가장 많이 저지르는 실수”라는 조언도 했다.
 
안혜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