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 중 대기업 최연소 상무에서 최고령 산모가 되어버린 오현진(엄지원)은 자신의 이름과 직업 대신 오직 아이의 태명과 성별, 출산경험 여부, 어느 병원 출신인지만을 묻는 세상에서 좌절감과 굴욕감을 동시에 경험한다.
최고급 조리원서 종일 수유 신경전
최연소 임원이 최고령 산모로 좌절
3년 전 출산한 작가의 울분도 담겨
일상 속 여성 차별이 문화 키워드로
예능 출신 제작진이 뭉친 만큼 여성에 대한 차별과 불평등이 만연한 ‘웃픈’ 현실을 재치있게 풀어낸다. 산모들이 모유파와 분유파로 나뉘어 싸우는 모습 등 출산과 육아를 둘러싼 다양한 논란거리를 끄집어내기도 한다. 덕분에 시청률은 3~4%대지만 이를 훨씬 웃도는 화제성과 파급력을 자랑한다. 워킹맘인 이지선(35)씨는 “몇 달 만에 복직하느냐를 고민하는 순간부터 꼬리칸에 탑승하는 기분이었다”며 “모성애가 원래부터 있는 게 아니고 나도 엄마가 처음이니 혼란스러운 게 당연하다는 드라마가 나온 것만으로 큰 위로가 됐다”고 말했다.
이처럼 여성이 일상 속에서 겪는 성차별이 주류 대중문화 콘텐트로 부상하고 있다. 지난달 연재를 마친 수신지 작가의 후속작 ‘곤’은 ‘며느라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낙태를 둘러싼 사회의 이중적 잣대를 담아낸다.
수신지 작가는 웹툰 후기에서 “민사린이 아이를 낳고 복직을 하고 워킹맘으로 살아가며 일어나는 무수한 이야기를 상상하다 낙태죄라는 이슈를 마주하게 됐다”고 밝혔다. 국립과학원 주도로 낙태 여부를 알 수 있는 IAT(Induced Abortion Test)를 만들어 1939년생부터 2006년생까지 대한민국 여성을 전수 조사해 한 번이라도 낙태를 경험했다면 감옥에 간다는 설정이다. 과거 국가 인구통제정책으로 낙태한 중년 여성, 원치 않는 임신을 한 미혼 여성, 아이를 갖기 위해 시험관 시술을 한 여성 등이 줄줄이 문제가 되고, 아이를 돌봐주던 시어머니 혹은 친정어머니가 감옥에 가게 되면서 돌봄노동에 공백이 생긴 워킹맘들까지 도미노처럼 쓰러진다.
타임은 『82년생 김지영』에 대해 “많은 젊은 여성이 암묵적으로 강요받아온 역할을 돌아보게 한다. 이들이 평생에 걸쳐 받아온 성차별은 너무나 작으면서도 크고, 슬프게도 매우 흔한 일”이라고 평했다.
성균관대 사회학과 구정우 교수는 “최초의 여성 장관, 여성 CEO 같은 사회권력층의 변화도 중요하지만 일상이 변해야 피부로 와 닿는 변화가 더 크기 때문에 대중문화에서 조명되고 새로운 담론이 형성되는 것의 의미가 크다”며 “최근 사유리가 제기한 비혼모 출산 문제처럼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다양한 가족 형태에 대한 논의도 함께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여성 서사가 주목받는 현상은 제작 환경의 변화와도 맞물려 있다. 공희정 대중문화평론가는 “케이블과 종편뿐만 아니라 OTT 등 플랫폼이 다양화하면서 차별화된 소재와 포맷을 찾는 움직임도 보다 활발해졌다”며 “장르물도 거대 담론보다 일상 속에서 정의를 위해 싸우는 작품들이 호응을 얻은 것처럼 여성 화자가 많아지면서 그 영역이 보다 넓어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산후조리원’은 1회당 60분 안팎의 8부작, ‘며느라기’는 1회당 20분 안팎의 12부작으로 기존 16부작 드라마의 기승전결 구조에서 자유로운 편이다. 공 평론가는 “그동안 로맨스물에서도 남자주인공의 비중이 더 컸다면 요즘은 여자주인공으로 중심축이 옮겨지는 추세”라고 덧붙였다.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