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현상의 시시각각

[이현상의 시시각각] ADPi에 소송이라도 걸어라

중앙일보

입력 2020.11.20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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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 논설위원

정말 백지화를 말한 걸까. 김해신공항검증위원회가 ‘근본적 검토 필요’라는 결론을 내자 여당은 기다렸다는 듯 설계도를 찢어버렸다. 특별법까지 앞세우며 가덕도행을 서두르고 있다. 하지만 출발점부터 확인해야 한다. 검증위는 딱 부러지게 ‘불가’라고 말하지 않았다. 김수삼 위원장은 “결정은 정부의 몫”이라며 슬쩍 비켜섰다. 애초부터 이 문제의 성격이 정치적이라는 고백과 다름없다.
 
검증위의 고민을 짐작할 수 있는 사건이 있다. 중앙 언론은 대부분 지나쳤지만 최종 보고서 채택을 앞두고 검증위 내부의 갈등이 표면화한 일이 있다. 9월 25일 검증위는 최종 보고서 의결을 위해 전체 위원회를 열었다. 그런데 안전분과위원장과 2명의 소속 위원이 끝내 참석을 거부했다. 자신들이 작성한 보고서를 수정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최종 보고서의 조율과 작성은 검증위원장과 4명의 분과위원장으로 구성된 총괄분과위원회 몫이다. 이견이 해소되지 않자 위원장은 규정에 따라 전체 위원 투표로 보고서를 통과시켰다. 21명 위원 중 13명이 참석해 12대 1로 통과된 보고서에는 ‘조건부 의결’이라는 꼬리표가 달렸다.

이해 안 되는 김해 백지화 이유
4년 전 선정 업체에 손배 청구해
국민 납득시키는 건 어떤가

이런 사실은 부산 지역 언론 보도로 알려졌다. 지역 언론과 부산시는 “검증위가 김해신공항 유지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안전분과 의견을 무시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막상 검증위의 결론은 정반대였다. 보기에 따라서는 검증위 전체 분위기는 김해신공항 유지였는데, 최종 발표를 앞두고 기류가 바뀌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실제로 이달 초까지만 해도 ‘김해 유지’ 결론이 날 줄 알았는데 막판에 바뀌어 어리둥절하다는 검증위원의 증언이 나오기 시작했다. 검증위의 어정쩡한 결론은 정치적 문제를 기술적으로 풀려다 엉켜버린 흔적 아닌가.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가. 여당 대표가 부산을 찾아 “희망 고문을 끝내겠다”고 했고, 원내대표가 욕설과 함께 “국토부 2차관 들어오라고 해”라고 고함친 일이 오버랩된다. 물론 억측일 수 있다. 안전분과 위원들의 고집이 몽니가 아니라 전문가적 소신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검증위 내부에서 격렬한 의견 충돌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총리실은 위원장을 제외하고는 검증 위원들의 명단도 공개하지 않았다. 내부 논의를 비공개에 부쳐 왔다. 외부 압력을 차단하겠다는 의도다. 그런데 그 차단막이 내부 논의의 굴절을 감추는 데 이용됐을 가능성은 없는가. 경제성 조작을 통해 조기 폐쇄를 결정한 월성 1호기 같은 일은 없었는가.
 
수조원의 국책사업이 손바닥 뒤집히 듯 바뀐 것은 보통 사태가 아니다. 의문을 해소하는 최선의 방법은 감사원 감사지만, 원전 감사에서 이미 진을 뺀 감사원이 나설 가능성은 희박하다. 방법은 있다. 4년 전 김해공항 확장이 최적안이라고 했던 프랑스 파리공항공단엔지니어링(ADPi)에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이다. 이 회사가 어떤 회사인가. 공항 설계에 관한 한 세 손가락에 꼽히는 세계 최고 업체 아닌가. 20억원의 용역비를 주면서 신공항 입지 선정을 맡긴 것은 이런 공신력 때문이었다. 4년 만에 강산이 개벽할 리도 없는데 180도 다른 결론이 나왔다면 애초 엉터리 조사를 했다는 것 아닌가. 정부가 손배 소송에 나서지 않는다면 배임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여당으로선 소송을 통해 4년 전 결정이야말로 오히려 정치적이었다는 자신들의 주장이 사실로 밝혀지는 ‘망외의 소득’도 기대할 수 있다. 김해신공항 검증위도 마다할 건 없을 것 같다. 국내 전문가들이 무슨 역량으로 세계 최고 전문가들의 결정을 뒤집느냐는 차별적 시선으로부터 벗어날 좋은 기회다.
 
김해신공항 백지화에 정치적 목적이 없다는 말을 믿고 싶다. 하지만 신앙이 아닌 다음에야 최소한의 논리와 객관성이 필요하다. 가덕도행 급행열차에는 아무 설명문이 없다. 정부와 ADPi 간 ‘논리 배틀’이라도 보면서 그 이유를 납득하고 싶은 심정이다.
 
이현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