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상언의 시시각각

[이상언의 시시각각] KAL·아시아나와 ‘벼락 통일’

중앙일보

입력 2020.11.19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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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언 논설위원

이명박 전 대통령은 통일이 도둑처럼 올 것이라 말했고, 어느 학자는 벼락처럼 닥칠 것이라고 했다. 최근 역사는 정말 그랬다. 현대사에 등장한 분단국가 통일은 잘 짜인 계획의 성사가 아니었다. 돌발적 사태에 가까웠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독일 통일에는 동독 대변인의 말실수와 언론의 ‘낚시’ 제목이 기폭제가 됐다. 1989년 11월 9일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선전비서였던 귄터 샤보브스키가 동독 주민의 서독 여행 허용 방침에 대한 외신기자의 질문을 받았다. “언제부터 시작되느냐”는 물음에 샤보브스키는 “아마도 지금?”이라고 답했다. 동독의 계획은 심사를 거친 선별적 허가였는데,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외신들은 ‘베를린 장벽이 열렸다’고 보도했다. 은유적 표현이었다. 당장 자유 왕래가 보장된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동베를린 주민이 장벽 앞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날 밤 벽이 허물어졌다. 통일은 11개월 뒤에 완성됐다.

독일·예멘 모두 급작스럽게 통일
통합에 실패한 예멘은 난민 양산
항공사 빅뱅이 모범 사례가 되길

남북으로 갈렸던 예멘은 90년 5월에 하나가 됐다. 그로부터 반년 전 남북 정상회담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북측은 국방·외교만 통합하는 일종의 연방제 통일안을 제시했는데, 남측에서 느닷없이 전면적 통일을 제안했다. 국가의 주요 자리를 절반씩 나눠 갖는 게 조건이었다. 북측 지도자가 덥석 물었다. 남예멘 인구는 250만 명, 북예멘 인구는 1100만 명이었다. 50% 대 50%는 이행되기 어려운 약속이었고, 지켜지지 않았다. 통일을 번갯불에 콩 굽듯 성사시킨 것은 원유였다. 80년대 말 남·북 예멘 접경지대에서 유전이 발견됐다. 소련 원조가 거의 끊겨 최빈국 상태에 있던 사회주의 국가 남예멘은 유전 공동개발이라는 북예멘의 당근을 물리치기 어려웠다.
 
중앙일보에 칼럼을 쓰는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는 북한 정권 붕괴 가능성을 여러 차례 언급했다. 북한에 코로나19 또는 다른 감염병이 확산하거나 경제난이 더 심해져 김씨 일가의 지지 기반이 흔들리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고 했다. 급변 사태가 언제든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대한항공의 아시아나 인수는 벼락 통일을 떠올리게 한다. 두 회사는 선의의 경쟁을 넘어 적대적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해외 노선을 놓고 고지 점령 작전 같은 전투를 하기 일쑤였고, 상대방을 의식한 적자노선 운항도 울며 겨자 먹듯 했다. 2011년 치열한 전쟁 하나를 현장에서 목격했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로 유출된 한국 외규장각 도서 운반을 둘러싼 투쟁이었다. 아시아나는 파리로 화물기를 보낼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한국 정부에 로비력을 발휘해 수송건을 따냈다. 그 바람에 외규장각 도서는 볼썽사납게도 여객기 아래 짐칸에 실려 145년 만에 귀국했다. 프랑스를 오가는 화물기를 보유한 대한항공은 황당한 결론에 분통을 터뜨렸고, 아시아나는 양국 공항에서 행사를 벌이며 승리의 휘파람을 불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노래하지만, 통일은 장밋빛 미래를 보장하지 않는다. 나름 준비했던 독일도 휘청거렸다. 탄탄한 경제력이 통합작업을 뒷받침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혼란이 이어졌을 수도 있다. 예멘은 통일 뒤 내전에 휩싸였다. 남예멘은 이슬람 무장단체 소굴이 됐다. 100만 명 넘는 난민이 생겼다. 그 난민이 제주도에도 왔다. 실패한 통일의 결과는 끔찍하다.
 
대한항공 고위 관계자는 “조원태 회장을 비롯한 임원들이 16일 모였다. 그 자리에서 ‘아시아나가 죽으면 우리도 죽는다’는 말이 나왔다. 인수한 아시아나가 망하면 대한항공도 생존하기 어렵다. 그러면 결국 함께 국유화 운명을 맞게 된다. 따라서 아시아나 직원들이 동요하지 않고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동독인이 품었던 ‘2등 국민’ 불만이 나오지 않게 하겠다는 이야기였다. 벼락처럼 닥쳐온 일이지만 통합의 모범 사례가 되길 바란다. 크게 보면 머지않아 나라 전체가 겪을지 모르는 일이다.
 
이상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