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분수대] 귀차니즘

중앙일보

입력 2020.11.19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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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애란 금융기획팀장

귀찮다는 감정은 힘이 세다. 모든 것을 무력하게 만들 수 있다. 살을 빼기 위해 운동하겠다는 다짐도, 주식 투자로 부자가 되고 싶은 욕심도, 자기계발로 더 나은 직업인이 되겠다는 포부도 ‘귀차니즘’ 앞에서는 물거품이 되곤 한다.
 
왜 그럴까. 여러 연구가 있다. 사회심리학에선 ‘인지적 구두쇠’로 설명한다. 사람은 정보를 처리할 때 두뇌가 쓰는 에너지를 절약하려 한다. 한마디로 깊고 복잡하게 생각하길 싫어하는 것이 본성이다. 행동경제학 개념인 ‘현상유지 편향’도 귀차니즘으로 이어진다. 특별한 이득이 없는 한 인간은 현재 행동으로 바꾸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혁신이란 귀찮음이란 본성에 기반해 탄생하곤 한다. 모바일뱅킹에서 공인인증서를 없앤 카카오뱅크, 마그네틱 카드 단말기에 스마트폰을 대기만 하면 결제가 되는 삼성페이의 성공이 그렇다. 그 이전에도 모바일뱅킹이나 간편결제 서비스는 있었지만 대중화되지 못했다. 카카오뱅크와 삼성페이는 낯선 서비스로의 진입에 걸림돌이던 귀찮은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혁신을 이뤘다.
 
구독경제의 성장은 귀찮음 덕분이다. 소비자들은 한번 구독신청을 하고 나면 귀찮아서 의사결정을 쉽게 바꾸지 않는다. 콘텐트 애플리케이션을 처음 한 달간 무료로 제공해 일단 구독하게 만들면 장기간 구독으로 이어져 매출을 증대할 수 있다.


귀찮음의 결과가 새로운 서비스를 못 쓰거나, 구독료를 낭비하는 수준이라면 그리 큰 손해는 아니다. 하지만 내 돈 찾을 권리를 포기하게 하는 수준이라면 심각하다. 실손보험 청구가 그렇다.
 
귀찮아서 보험사에 청구하지 않는 실손보험 건수가 상당하다. 진료비가 소액이면 최소 자기부담금(1만~2만원)을 빼고 쥐게 될 보험금이 얼마 안 되다 보니 아예 포기해서다. 병원에서 종이서류를 떼고 이를 다시 보험사에 보내는 과정의 번거로움 때문이다.
 
이로 인한 소비자 손해가 얼마인지는 추산도 안 된다. 연 1000억원은 될 거란 추정만 있다. 종이서류 없이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으로 간편하게 보험금을 청구하는 기술적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다. 다만 법이 문제다. 8년간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한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법안이 이번엔 힘을 받을 것인가. 지난해 독감 진료비를 아직도 청구하지 않은 귀차니스트의 관심사이다.
 
한애란 금융기획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