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14일 반북단체 천리마민방위(현 자유조선)의 리더 에이드리언 홍 창에게 다급한 목소리의 전화가 걸려왔다. 4년간 북한 관련 정보를 교환해온 친구였다. 그는 자신이 마카오에서 신변의 위협을 받고 있다며 다른 곳으로 도피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전화가 걸려온 날은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신경작용제 공격을 받고 피살된 다음 날이었다. 그리고 전화를 건 주인공은 김정남의 아들, 김한솔이었다.
한국계 작가 수키 김, 뉴요커지에 탈출 전모 공개
2019년 2월 스페인 마드리드의 북한 대사관을 습격했다가 미 수사 당국의 수배를 받는 홍 창이 언론 인터뷰에 등장한 건 처음이다. 수키 김은 에이드리언이 공개 수배되기 한 달 전 미국 뉴욕 타임스퀘어의 한 식당에서 그를 만났다고 밝혔다.
그에 따르면 홍 창과 김한솔은 2013년 파리에서 만났다. 홍 창은 김한솔을 “명품 구찌 신발을 신은, 돈이 많은 아이”로 기억했다. “김정남이 평생 얼마나 많은 현금을 숨겨둔 것일까라는 생각도 들었다”고 했다. 첫 만남에서 김한솔은 “당신(홍 창)이 북한과 관련해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후 두 사람은 북한 정보를 교환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연락을 취했다.
밤 중에 걸려온 전화… “신변에 위협, 도와달라”
홍 창은 즉시 자유조선에서 함께 활동하는 한국계 미국인 크리스토퍼 안(크리스·38)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때마침 필리핀 마닐라에 머물고 있던 크리스는 곧장 대만 타이베이 공항(Taipei Airport)으로 향했다.
15일 이른 새벽, 크리스는 공항에서 김한솔 일행을 만났다. 홍 창이 미리 알려준 암호 ‘스티브’로 신분을 확인했다. 김한솔은 키 177.8㎝(5피트10인치)의 장신으로 긴팔 셔츠에 코트 차림이었다. 그의 누이는 청바지 차림에 미국의 평범한 10대 후반 청소년 같았다고 한다. 김한솔과 누이는 영어가 유창했지만, 어머니는 한국말로 대화했다. 이들은 모두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였다. 불안해하는 어머니에 김한솔은 “홍 창이 보낸 사람이다. 나는 그를 믿는다"며 안심시켰다.
이후 크리스와 김한솔은 공항 라운지로 자리를 옮겨 한동안 머물렀다. 긴장을 풀기 위해 말을 건네는 크리스에게 김한솔은 할아버지 김정일과 낚시했던 일화를 들려주기도 했다. 같은 시각 홍 창은 미국에서 김한솔 가족을 받아줄 후보국 3곳과 접촉했다.
한 차례 거절당한 출국길
하지만 공항 직원이 출국을 막았다. 공항 직원은 김한솔 측이 내민 여권을 확인하더니 “탑승을 하기에 너무 늦었다”며 탑승을 거부했다. 크리스가 “다른 승객들은 문제없이 탑승하고 있지 않으냐”고 항의했지만 직원은 “해당 여객기 탑승객이 아니다”라며 언성을 높였다. 홍 창은 “당시 김정남의 피살 사실이 알려지면서 김한솔 가족의 출국을 막았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로부터 몇 시간 뒤 자신을 CIA 요원이라고 밝힌 남성 두 명이 크리스를 찾아왔다. 한 명은 ‘웨스(Wes)’라는 이름의 한국계 미국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백인이었다. 그들은 김한솔과의 대화를 요청했지만 크리스는 김한솔에 "어떤 말도 할 필요가 없다"고 제지했다.
하지만 다음날 한결 친절한 모습으로 나타난 공항 직원이 김한솔 가족의 암스테르담행 새 티켓을 구매를 도왔다. 당시 암스테르담행 비행기에는 CIA 요원도 함께 탔다. 김한솔은 탑승 전 자신의 상황을 밝히고, 네덜란드와 미국, 중국에 감사하다는 내용 담긴 비디오를 촬영했다. 2017년 3월 8일 자유조선이 천리마 민방위 유튜브를 통해 공개한 그 영상이었다. 홍 창은 자신들이 김한솔을 납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보험용'으로 이 영상을 촬영했다고 밝혔다. 영상에서 천리마 민방위나 홍 창은 언급되지 않았다. 하지만 영상 상단에 ‘천리마 민방위’ 로고가 담겨 이 단체가 김한솔의 탈출을 도왔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왔었다.
사라진 김한솔은 어디에
두 사람은 다시 호텔 1층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지만 김한솔은 이때도 나타나지 않았다. 홍 창은 CIA가 김한솔 가족을 다른 곳으로 데려갔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김한솔의 거주지는 확인되지 않은 상태다.
스페인 북대사관 습격 사건 이후 잠적한 홍 창
홍 창은 당시 스페인 경찰을 따돌리기 위해 김정은 배지를 달고 북한 대사관 직원인 척 행동했다고 밝혔다. 출동한 스페인 경찰에게 스페인어로 “오해가 있었다”고 둘러댔다는 것이다. 이후 대사관을 빠져나와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뉴욕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각자 다른 공항으로 흩어졌다고 했다.
홍 창은 범행 동기에 대해 “북한 주민들의 인권 때문”이라고 답했다. 북한 정권이 북한 대사관 내부 사람들을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특정 정보를 노렸다는 것이다. 자유조선 측은 이후 스페인 정부에 이메일을 보내 스페인에 입국하는 북한 주민들을 감시하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뉴욕으로 온 홍 창은 14일 동안 대사관에서 가져온 컴퓨터의 보안 장치를 풀기 위해 애썼다. 컴퓨터가 전세계에서 벌어지는 북한의 비밀대화를 푸는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끝내 잠금을 해제할 수 없었다. 이어 FBI·CIA와 접촉했고 2019년 3월, FBI가 김정은 정권에 수준 높은 제재를 가할 수 있다는 희망에 컴퓨터를 건넸다. 홍 창은 결국 이 컴퓨터를 돌려받지 못했다.
워싱턴포스트(WP)도 당시 자유조선 측과 FBI의 접촉 사실을 보도한 바 있다. FBI는 자유조선과의 접촉에 대한 질문에 “특정 조사에 관해 확인도 부인도 할 수 없는 것이 FBI의 기본 입장”이라고만 밝혔다.
한 달 뒤인 2019년 4월, 미 수사당국은 홍 창을 공개 수배했다. 스페인 주재 북한 대사관을 습격하고, 직원을 불법 감금했다는 혐의를 적용했다. 크리스도 공범으로 지목됐다. 그는 해당 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LA에서 체포돼 보석 상태로 재판을 받고 있다.
수키 김은 홍 창이 잠적 1년 만인 지난 5월 휴대전화 메시지로 연락을 취했다고 밝혔다. 수키 김에 따르면 홍 창은 “미 수사 당국의 지명수배는 오히려 북한 당국에 자신들의 신분을 노출하는 꼴이 됐다”며 미국 당국에 불만을 표출했다. 하지만 그는 계속 북한 정권에 대항하겠다고 했다. “이런 정권은 천천히 무너지지 않고 갑자기 무너진다. 대개 모든 혁명이 이런 식으로 이뤄지고 북한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게 그의 얘기다.
이민정 기자 lee.minjung2@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