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엔 정말‘도인’(道人)들이 산다. 만원권 지폐 뒷면에 새겨진 국내 최대 지름 1.8m의 반사망원경이 있는 곳. 한국천문연구원 산하 보현산천문대다. 산 아래 사찰이 불도(佛道)를 닦는 스님이 머무르는 곳이라면, 이곳은 하늘의 도를 깨우치려는 천문학자들의 터다. 불제자들의 하루가 오전 4시 새벽예불로 시작한다면, 천문대의 하루는 해가 지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돼 동이 트기 전까지 이어진다.
경북 영천 보현산천문대 르포
국내 최대 1.8m 반사망원경
천문대와 세월 보낸 전영범 박사
“별의 본질과 진화 연구한다”
전 책임연구원은 변광성(變光星)을 좇는 천문학자다. 변광성은 밝기가 변하는 별을 말한다. 주기적으로 변하는 별도 있고, 불규칙적으로 변하는 별도 있다. 10년 전 구상성단에서 쌍성이 돌면서 하나를 가리는 식쌍성을 발견, 미국 천문학술저널 아스트로피지컬에 싣기도 했다. 그는 “변광성 연구는 별이 어떻게 탄생해서 죽어가는가 하는 별의 본질과 그 진화를 연구하는 것”이라며 “나는 결국 우주에 대한 호기심을 계속 추구하고 있는 것이며, 인류가 우주를 이해하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전 책임연구원이 ‘데이터’라고 말했듯, 요즘 천문 관측은 망원경 경통의 끝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천체망원경이 디지털화하면서 사람의 눈 속 망막을 CCD(전하결합소자장치)가 대신하고 있다. 연구자는 망원경과 연결된 컴퓨터 모니터를 볼 뿐이다. 과거엔 망원경 끝에 필름카메라를 달아서 사진을 찍고, 한 장 한 장 현상ㆍ인화하느라 연구의 속도가 느렸지만, 이젠 CCD와 연결된 컴퓨터로 실시간 데이터가 끝없이 쏟아진다. 이렇게 모니터에 나타난 우주는 흑백이다. 일반인이 들여다보면 모니터 속 장면이 우주 속 별인지, 전파가 제대로 잡히지 않은 TV채널 화면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수도승이 벽을 바라보며 수행에 정진하듯, 천문학자들은 긴긴밤을 흑백 모니터 속 점과 선들을 관찰하면서 우주의 비밀을 캐낸다. 그러고 보니 올해 환갑을 맞은 전 책임연구원의 해맑은 얼굴이 선승(禪僧)의 모습이다.
전국 곳곳에 공ㆍ사설 천문대가 적지 않지만, 보현산천문대는 한국 천문학의 메카와 같은 곳이다. 1996년 보현산 천문대가 설립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소백산천문대의 지름 61㎝ 반사망원경이 가장 첨단이었다. 전 책임연구원은“보현산천문대가 만들어질 당시만 하더라도 천문연구원 전체 연구의 3분의 1을 감당했다”며 “당시엔 전국 곳곳의 연구자들로 보현산이 북적였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이제는 역할이 30분의 1로 줄어들었단다. 앞서 얘기했듯 세계 곳곳의 천문대를 이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한국천문연이 세계 최대 거대마젤란망원경(GMT) 국제프로젝트에도 함께 하고 있다. 2025년 완공 예정인 GMT는 지름 8.4m의 반사경 7개를 모아 지름 25.4m 단일 반사경과 같은 기능을 한다. 보현산천문대의 1.8m 망원경이 인근 영천시의 100원짜리 동전을 식별할 정도라면, GMT는 400㎞ 밖 금강산 너머의 같은 동전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성능이다.
전 책임연구원은 “보현산천문대가 설립된 지 25년이 돼가지만 아직은 나름 연구용으로 역할이 충분하다”면서도 “하지만 언젠가는 일반인에 개방하는 시민천문대나 박물관 역할을 하게 될 날이 올 것”이라며 여운을 남겼다.
자정이 됐다. 남동쪽 하늘에 알니타크ㆍ알닐람ㆍ민타카 3개의 밝은별을 허리에 두른 거대한 오리온 자리가 올라오고 있었다. 이날 보현산천문대 돔에는 40년 전 소백산천문대를 찾은 전 책임연구원처럼 충북대에서 왔다는 대학원생 한 명이 관측실을 지키고 있었다.
영천= 최준호 과학ㆍ미래 전문기자 joonh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