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수록 좋구나, 큰스님과 미술사 대가 ‘팔순의 그림’

중앙일보

입력 2020.11.10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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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파스님의 칠화는 불교미술과 민화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현대적인 해석을 곁들인 것이 특징이다. 모두 옻판에 옻칠로 완성했다.

경남 양산 통도사에 수행하며 예술혼을 불태우는 큰 스님 한 분이 있다. 영축총림 통도사 방장 성파(81)스님이다. 옻나무에서 추출한 옻액과 오방색의 채색염료로 그림을 그려온 스님은 2014년 서울 인사동 한국미술관, 2017년 경남도립미술관에서 대규모 전시를 연 바 있다. 지난여름엔 통도사 성보박물관에서 ‘옻칠민화 특별전’을 열어 작품 100여 점을 선보였다.
 

성파스님의 칠화는 불교미술과 민화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현대적인 해석을 곁들인 것이 특징이다. 모두 옻판에 옻칠로 완성했다.

지난 8월 초 통도사를 찾은 소헌(笑軒) 정양모(86·백범김구기념사업회장)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작품을 보고 또 들여다보며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지난 10년간 종종 만나온 성파스님의 두 손을 꼭 잡고 이렇게 말했다. “스님, 제가 가을에 서울서 전시를 엽니다. 스님 작품을 함께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성파스님은 “관장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면 같이 하겠습니다”하고 흔쾌히 대답했다.

11일부터 나마갤러리 ‘지음지교’전
정양모 전 박물관장, 통도사 성파
도자기 그림 29점, 옻칠화 17점
거장의 손길로 우리문화 멋 그려

서울 돈화문로 나마갤러리에서 정 전 관장과 성파스님이 함께 참여하는 특별기획전 ‘지음지교 (知音之交)’가 11일 개막한다. 평생 다른 길을 걸어온 80대 두 거장의 각각 성격이 다른 작품을 한자리에서 보여주는 독특한 전시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산 역사’‘한국미술의 산증인’라 불리는 정 전 관장은 도자기 위 붓으로 그린 그림 29점을 선보이고, 성파스님은 칠화 17점을 선보인다. 성파스님의 출품작은 정 전 관장이 골랐다. “성파스님의 작품 중 특히 상상력과 독창성이 두드러지는 작품으로 골랐다”고 했다.
 

성파스님과 정양모 전 관장. [사진 나마갤러리]

정 전 관장은 한국 도자기 연구에서 최고 권위를 지닌 미술사학자다. 국립경주박물관장을 두 번 역임하고 국립중앙박물관장(1993.3~1999.12)을 지내는 등 1962년부터 99년까지 박물관에서만 38년을 근무했다. 이번 전시는 2015년 그의 팔순 잔치를 겸해 제자들이 기획한 희묵전(戱墨展)에 이은 두 번째 전시다. 정 전 관장은 “저는 작가도 아니고, 제 것은 작품이랄 것도 없다”며 “평생 도자기 등 우리 문화재를 접하며 보고 기억에 남은 것들을 끄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도예가인 아들 정진원 국민대 교수가 만든 도판과 도자합 위에 정 관장은 그림과 글로 우리 문화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38년간 박물관에서 일하며 보았던 것을 그림과 글로 풀었다. 백자합은 아들인 도예가 정진원 교수의 작품이다.

그림 29점 중 부귀영화를 상징한다는 ‘모란’ 그림이 6점이나 된다. 정 전 관장은 “한국의 문양 중 모란이 으뜸”이라며 “가장 많이 그려졌고, 놀라울 정도로 다양하게 표현됐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 선조들은 디자인에 천재적인 소질이 있어 꽃잎을 탐스럽게도, 추상적으로도 표현했다.”고 말했다.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38년간 박물관에서 일하며 보았던 것을 그림과 글로 풀었다. 백자합은 아들인 도예가 정진원 교수의 작품이다.

‘15세기 분청사기에 그려진 견공’은 수십 년 전 모 유명 인사가 감정을 의뢰한 기억을 떠올리며 그린 작품이다. 그는 “수만 개의 도자기를 보았지만 도자기의 견공 그림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했다. 또 조선시대 최고급 백자를 생산한 경기도 광주 분원리 마을 그림엔 “우리 민족의 자존심인 분원리 가마터를 우리가 보존하지 못한”데 대한 안타까움을, 사방탁자 등 문방 그림엔  “공간 구성과 면 분할에서 탁월한 조형미를 보여주는 목기”에 대한 자부심을 표현했다. 정 전 관장은 “우리에겐 중국·일본과는 확연히 다른 미감이 있다. 자연스럽고 담담한 데서 우러나오는 아름다움과 품격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38년간 박물관에서 일하며 보았던 것을 그림과 글로 풀었다. 백자합은 아들인 도예가 정진원 교수의 작품이다.

성파스님의 칠화 작업은 민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소재와 표현을 자유럽고 풍부하게 한 것이 특징이다. 정 전 관장이 “민화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성파스님만의 작품”이라고 소개하는 이유다.
 
성파스님은 “옛 속담에 ‘꿈에서 스님만 봐도 옻오른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옻칠은 사찰문화와 밀접했던 전통공예기법”이라며 “그러나 이게 사찰에서도 사라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오히려 그 색이 더 살아나는 칠 문화의 소중한 맥을 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고 말했다. 작품에 대해선 “처음엔 민화의 틀 안에서 그렸지만, 나중엔 상상력을 보태며 마음 가는 대로 그린 것”이라고 소개했다. 정 전 관장이 꼽는 성파의 ‘걸작’은 ‘미륵존’이다. 정 전 관장은 “큰 스님이 생각하는 미륵보살이 이 그림에 다 표현돼 있다. 볼수록 참 좋은 그림”이라고 말했다.
 
정종효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실장은 “스님의 칠화 작업은 전통의 흐름을 이으면서도 한국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여정”이라며 “스님의 칠화는 기존 민화에서 볼 수 없었던 화려하면서도 중후한 색감, 스님만의 감각으로 자유자재로 풀어놓은 조형성이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박주열 나마갤러리 대표는 “정 전 관장이 17점을 고른 뒤 스님께 더 보탤 작품을 여쭸더니 중국 진나라 거문고의 달인 백아와 그의 거문고 소리를 알아주던 종자기의 지음지교를 말씀하시며 티끌 하나도 더할 게 없다고 하셨다”면서 “성파스님 작품은 판매하지 않지만,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을 차분하게 전하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는 30일까지.
 
서울·양산=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