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은 일단락됐지만 단절의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패배한 트럼프가 끝내 승복하지 않을 것이고, 성난 군중이 곳곳에 무장 바리케이트를 칠 것이다. 미국 민주주의는 막장으로 치닫는다. 회복할 수 있을까? 후진국에 ‘미국 민주주의’는 일종의 신앙이었다. 미국은 민주주의를 잉태한 국가이고 근대 문명기 동안 민주정치의 최전선을 일궈온 혁명국가였다. 자유시장과 민주주의를 결합한 인류문명 최선의 체제는 미국이 존재하는 한 영원할 줄 알았다. 시대가 바뀌면 신앙도 무너지듯, 미국 민주주의가 붕괴하는 굉음을 견뎌야 하는 것은 고통이었다. ‘OK목장의 결투’보다 못했다. 그곳엔 총잡이의 품격이라도 있었으니까.
OK목장의 결투같은 미국 대선
망가진 민주주의, 회복 가능할까
치솟는 불평등이 민주주의의 적
우울한 전망, 우리를 돌아보게 해
아버지 부시와 마이클 두카키스 매사추세츠 주지사가 맞붙었던 1988년 대선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아이오와 코커스를 기점으로 시카고, LA, 애틀란타를 들러 유세현장과 투표민심을 살폈다. 우연히 지역 방송과 인터뷰 자리에 섰는데 군부독재 후진국 청년의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 나왔다. ‘맑스도 예수도 없는 혁명’. 이 말은 프랑스 정치학자 르벨(J.F. Revel)의 책 제목이다. 20세기 세계혁명은 오직 미국에서만 가능함을 역설했다. 과학기술, 경제력과 풍요한 사회, 언론자유, 이 세 가지를 겸비한 유일한 국가였던 것이다. 한 가지를 덧붙이면 ‘자치제도’, 프랑스 사회학자 토크빌이 부러워하던 민주주의적 습속은 어디에도 없는 미국의 고유자산이었다.
프랑스 68혁명의 주역인 앙리 레비(Lévy)가 토크빌 탄생 200주년(2005년)을 기념해 미국대륙을 두루 돌아봤다. 『아메리칸 버티고(현기증)』란 여행기 서문에서 그는 폭탄발언을 했다. “만약 50년 전에 미국을 체험했다면 레닌과 마오쩌둥을 일찌감치 버렸을 텐데.” 레비는 ‘인간의 얼굴을 한 혁명’을 그곳에서 목격했던 것이다. ‘모든 조건의 평등’이 자유주의에 대한 무한 존경으로 발현되고, 충돌하는 개인적 신념을 조절하는 결사체적 생활예술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정치권력이 인민주권의 도그마(dogma)에 굴복하는 ‘미국의 미덕’은 왜 증발해 버렸는가.
타인종에 대한 백인 중산층의 관용심이 고갈됐다. 1980년대만 해도 백인들은 여유가 있었고, 최강의 문명국가를 일궜다는 자부심이 양보와 절제의 미덕을 길러냈다. 민주주의는 풍요시대의 총아였다. 그런데 불평등이 치솟기 시작했다. 2019년 미국연방통계국은 소득불평등이 50년 이래 최고치를 경신했다고 발표했다. 상위 10%가 하위 90% 총소득의 4배, 뉴욕의 상위 1%가 하위 99% 소득의 수십 배에 달했다. 디지털자본과 금융자본이 일자리를 먹어치웠다. ‘다운사이징!’ 해고열풍이 중산층을 타격한 1990년대 이후로 마음의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유색 인종은 일자리의 적이었다. 여기에 디지털자본이 만들어낸 SNS가 공론장을 사분오열시켰다. 언론과 방송에 대한 신뢰는 급전직하했다. 경제성장, 관용심, 공론신뢰 - 민주주의를 발효하는 요건들이 벌레 먹은 사과처럼 떨어져 내렸다. 양보와 절제가 사라진 공간에 갈등과 반목이 판치는 것은 인류사회의 공통된 현상, OK목장의 혈투가 벌어진 배경이다.
기관총과 권총으로 무장한 시위대가 일상적 풍경이 된 OK목장 미국에서 민주주의는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두 중국은 합중국이 될 수 있을까? 민주주의 종주국을 바라보는 태평양 서안 국가 한국인들 마음에 불안과 절망이 고이는 오늘, 우리 주변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