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예영준 논설위원이 간다

[예영준 논설위원이 간다] ‘상감령 정신’ 강조하며 대미 지구전 태세 다지는 중국

중앙일보

입력 2020.11.06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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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정의의 승리’ 언급한 속셈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오른쪽)이 지난달 19일 베이징 중국인민혁명군사박물관에서 열린 항미원조 70주년 전람회에 리커창 총리와 상무위원들을 이끌고 참석했다. 시 주석은 ’항미원조 전쟁의 승리는 정의의 승리, 평화의 승리, 인민의 승리“라고 말했다. [신화=연합뉴스]

중국이 70년 전 6·25 전쟁의 기억을 대대적으로 소환하고 있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의 승리는 정의의 승리, 평화의 승리, 인민의 승리”라고 말했다. 지난달 19일 항미원조 70주년 전시회를 관람한 자리에서다. 시진핑 주석이 이런 말을 한 것은 처음이 아니다. 국가부주석 시절이던 2010년에도 “항미원조전쟁은 침략에 맞선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말했다. 후진타오(胡錦濤) 등 이전 지도자들은 공개석상에서 사용하지 않던 표현이다.
 
시 주석의 발언은 미·중 패권경쟁과 관련지어 해석할 수 있다. 중국의 논리대로라면 미·중 패권 싸움은 미국이 무리하게 국제규범을 깨고 싸움을 걸어와 일방적으로 중국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맞서는 건 70년 전의 항미원조처럼 ‘정의’로운 투쟁이다. 그런데 세계 제2위의 강대국으로 올라선 지금도 엄연한 국력 차이가 존재하고 중국은 여전히 열세다. 하지만 70년 전처럼 강한 상대방을 이기지 못하란 법은 없다고 본다. 문제는 방략이다.

“약자가 강한 상대 이기는 방략은
지구전 펼치며 담판 병행하는 것”
마오쩌둥의 군사전략과 일맥 상통

시 주석은 미국과 싸워 이길 방략을 몇 차례 제시한 적이 있다. 2017년 인민해방군 건군 90주년 기념식에서 그는 항미원조전쟁에서의 승리를 언급하며 ‘영고우피당(零敲牛皮糖)’이란 성어를 인용했다. 우피당은 깨강정 비슷한 중국 강남의 전통 과자 이름이고, ‘영고우피당’은 한입에 먹기엔 큰 강정을 잘게 잘라 먹어야 한다는 뜻이다. 시 주석은 우세한 전력의 적군을 상대하자면 전면전 대신 소규모 작전을 펼쳐야 한다는 군사교리로 이 성어를 사용한 것이다. 이는 마오쩌둥(毛澤東)의 군사전략과 일치한다. 중국 지도부는 지난해 초 마오쩌둥의 ‘지구전론’ 읽기 운동을 펼쳤다. 화력이 우세한 적이 공격해 오면 싸움을 피하며 힘을 빼는 전략적 방어(1단계)에 주력하고, 힘의 균형이 이뤄지면 전략적 대치(2단계)로 전환하며, 모든 조건을 아군에 유리하게 바꾼 연후에 전략적 반공(3단계)에 나선다는 게 마오의 지구전론이다. ‘화평굴기론’으로 국제사회에도 널리 알려진 원로학자 정비젠(鄭必堅)은 인민일보 기고문에 “우리에겐 지구전의 전통이 있다. 인내력이야말로 강력한 전투력이다”고 썼다.
 
직설적인 언설로 유명한 중국의 논객 후시진(胡錫進) 환구시보 총편집인은 더 분명하게 말한다. 그는 “미국은 지구전을 가장 두려워한다. 조선전쟁(6·25전쟁) 3년 중 2년은 싸우면서 담판했다. 담판 테이블에서 미국의 고개를 떨구게 한 건 끝까지 버티는 정신이었다. 지금이 바로 ‘상감령(上甘嶺) 정신’을 발휘할 때”라고 썼다. 아마 지금 시 주석이 가장 하고 싶은 말도 ‘상감령 정신’일 것이다.
 
‘상감령’은 항미원조의 상징과도 같다. 강원도 오성산의 고개 이름인 상감령은 지금 북한 땅이 되어 한국인에게는 생소하지만, 중국인이라면 교과서나 영화를 통해 서울·부산 다음으로 유명한 지명이다. 베이징 천안문광장에 있는 국가박물관에 있는 ‘부흥의 길’이란 이름의 상설 전시관에는 상감령에서 떠 온 적갈색 흙이 영구보존상태로 전시되어 있다. “중국 전사들은 1952년 가을 약 6만 명의 한국군·미군이 동원된 ‘김화 총공세’에 맞서 탄약은 물론 식수까지 떨어진 악조건을 뚫고 맨몸으로 싸워 물리쳤다”는 설명과 함께 “전시 중인 상감령 흙의 절반은 탄약·탄피로 채워졌다”고 적혀 있다. 그만큼 치열하고 처절했다는 뜻이다. 2012년 집권한 시진핑이 첫 대외일정으로 관람한 ‘부흥의 길’에는 1949년 건국 선포식에서 마오쩌둥이 게양한 중국 국기 실물, 공산당선언의 최초 중국어 번역본, 대장정 시기에 실제 사용된 장비가 전시되어 있다. 여기에 상감령 흙이 나란히 전시 중이란 사실에서 중국이 항미원조전쟁의 ‘승리’를 얼마나 중시하는지 읽을 수 있다. 마오쩌둥의 지시로 1956년에 만들어진 영화 ‘상감령’의 주제곡이었던 ‘나의 조국’은 아직도 제2의 중국 국가처럼 널리 불린다.


한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중국이 필요에 따라 선택적으로 항미원조를 소환한다는 사실이다. 미국과의 협력이 필요한 시기에는 항미원조가 부각되는 것을 자제해 온 것이 지난날의 중국이다. 2000년 국영방송인 중국중앙TV(CCTV)는 30부작 드라마 ‘항미전쟁’을 완성했다. 하지만 이 필름은 결국 빛을 보지 못한 채 묻히고 말았다. 중국 외교부의 반대논리가 당 지도부에 의해 받아들여진 데 따른 것이다. 당시 미국이 9·11테러라는 국가적 재앙을 겪고 있는 마당에 중국군이 미군을 격파하는 내용의 드라마를 방영하면 미·중 관계에 큰 손상이 일어난다는 논리였다. 앞서 덩샤오핑(鄧小平)이 이끌던 개혁개방 시기에도 6·25를 소재로 한 영화·드라마는 자취를 감췄다. 경제발전에 주력하면서 안정적인 대미관계는 물론 한국과의 경제협력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후진타오 집권기까지 이어져 오던 전통은 시진핑 집권 이후 달라지기 시작했다. 2016년 중국 공산당 베이징시 위원회의 통제를 받는 베이징TV가 38부작 드라마 ‘38선’을 방영하고, ‘나의 전쟁’이란 제목의 6·25 영화가 극장에서 상영됐다. 이때만 해도 국가적 캠페인의 수준에는 못 미쳤으나 6·25 70주년을 맞는 올해 항미원조 캠페인이 대대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드라마와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 및 방영이 줄을 잇고 있고 4년 이상 문을 닫았던 압록강변 단둥(丹東)의 항미원조 기념관도 예전보다 5배 확장해 재개관했다. 황병태 전 주중 대사는 이런 현상에 대해 “시진핑 집권 이후 장기집권을 추구하고 1인 지배를 강화하는 등 덩샤오핑 시대에는 보지 못했던 흐름 속에 벌어지는 일”이라며 “국제사회와의 불화가 계속되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중국 스스로 인식하고 바꿔 나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세기 한중친선협회장 “중국의 역사 왜곡에 정부가 입장 분명히 밝혀야”

이세기 한중친선협회 회장 . 임현동 기자

6·25 전쟁을 항미원조전쟁으로 규정하고 ‘정의의 승리’로 부르는 중국의 해석은 심각한 역사 왜곡을 담고 있다. 전쟁의 한쪽 당사자인 한국으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역사 왜곡이다. 정의의 전쟁에 맞서 싸우다 패배한 불의(불의)의 집단으로 전락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세기 한중친선협회장(전 통일원 장관)은 약 30년 동안 한·중 우호의 일선에서 활동해 왔고, 시진핑 주석 및 후진타오 전 주석과도 교분이 깊다. 한편으로는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6·25 전쟁과 중국』이란 책을 집필한 6·25 전문가이기도 하다.
 
‘항미원조전쟁은 정의의 승리’라는 시 주석의 발언을 어떻게 생각하나.
“정의냐 불의냐의 개념으로 보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고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6·25는 당시의 이데올로기 진영 대립과 국제정세 속에서 소련 스탈린의 음모와 중국 마오쩌둥의 복잡한 셈법, 김일성의 잘못된 계산이 얽혀 일어난 것이다. 중국은 김일성의 남침 계획에 사전 동의했다. 마오쩌둥이 동의하지 않으면 남침하면 안 된다는 것이 스탈린의 남침 승인 조건이었다.”
 
중국은 미국의 침략에 맞서 6·25에 참전했다고 주장한다.
“2차대전 종전 후 소련군이 점령했던 만주를 되찾아 오는 것이 마오쩌둥의 최대 관심사였다. 그 때문에 6·25에 참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한반도가 남한의 손에 통일되는 것을 막아야 하는 안보상의 이유도 작용했다.”
 
한·중 수교 과정이나 6·25를 둘러싼 상충되는 입장에 대한 논의는 없었나.
“6·25를 끄집어내면 수교란 공통의 목적에 방해되기 때문에 서로 논의를 회피한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중국인들과 오랫동안 교류해 왔는데 6·25에 관한 한 그들은 당의 공식 입장에서 한치도 벗어나는 발언을 안 한다. 진지한 학술적 토의가 안 된다. 안타까운 일이다.”
 
정의의 전쟁이 역사 왜곡이라면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정부는 분명히 우리 입장을 밝히고 넘어가야 한다. 그런데 다 아는 일이지만 정부가 입장 표명을 제대로 못 하고 있고, 할 생각도 별로 없는 것 같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중국이 생각을 바꾸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입장은 분명히 하되 한·중 관계가 과거 역사 문제로 후퇴하는 것도 방지해야 할 것이다.”
 
미·중 경쟁 속에서 한국은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나.
“한·중 친선활동을 오래 해왔고 개인적으로 중국에 많은 친구가 있다. 하지만 중국으로 미국을 대신하자는 입장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미국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중국과도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 지혜가 필요한 대목이다. 마찬가지로 중국도 강하게 대응하기보다는 좀 더 슬기롭게 행동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예영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