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명은 ‘노숙자 예수’(Homeless Jesus). ‘노숙자 예수’는 제법 유명하다. 캐나다 조각가 티모시 슈말츠가 세계 100여 도시에 설치해 놓았다. 마태복음 25장 34~40절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그 마지막 대목은 이렇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국내 첫 노숙인 문집 뭉클
1년 공부하며 자존감 찾아
삶의 가치 깨닫는 시편들
“인문학은 더불어 사는 것”
물론 이들의 현실은 고달프기만 하다. ‘장대비 속에 긴 배식줄/빗물바아압 빗물구우욱 비잇무울 기이임치이.(중략) 오로지 먹는 것 쑤셔 넣는 것. 빗물 반 음식 반 그냥 부어 넣는 것이다.’(권일혁 ‘빗물 그 바아압’) ‘밥 한 술 해결을 위해 찬송가와 거래를 하는’(유창만 ‘밥 한 술’) 일상이다.
일자리가 변변할 리도 없다. 서울역 생활 25년, 고물을 수집하는 노기행씨의 ‘이놈의 세상’을 보자.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하지만 그리 할 만한 일이 많지는 않다.(중략) 내 일이 없으면 내일이 없다. 추신:헌옷이나 잡다한 물건은 나를 주시오.’ 각박한 삶에서 걷어 올린 유머가 반짝인다. 폐지 실은 리어카를 끌고 서울역에서 출발해 조치원·청주·대전을 거쳐 해운대까지 왕복한 박진홍씨도 있다. 바다가 그에게 물었다. “너 왜 왔냐?” 그가 대답했다. “고물일 하고 있는데 너무 힘들고 네가 너무 보고 싶어가지고.”
이 책의 고갱이는 투명인간·잉여인간으로 살아가던 노숙인들이 평범한 일상으로 복귀하는 모습이다. 특히 거울 관련 대목이 인상적이다. 자신의 벗은 모습을 볼 수 없어 거울을 주먹으로 내리쳤던 고(故) 고성원씨는 “난 요즘 거울을 보기 시작했다. 기지개를 켜듯 조금씩 조금씩 자아에 대해 알게 됐다”고 했다. 서○미씨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지난 시간과는 다른 시간을 살아가리가 다짐해본다”고 썼다. 자신을 직시할 용기를 찾은 것이다.
그렇다면 인문학은 본체는 뭘까. “노숙인이 인문학을 한다면 꼴값한다고 수군거린다. (하지만) 인문학을 배운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변화가 시작된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깨닫는다.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웠고 동료들 사이에 공동체 의식이 생겼다.”(이○근의 ‘철학을 배운다’)
이만한 대답이 또 어디 있을까. “더 알고, 더 사랑하고, 더 안아주고, 그리고 그 기쁨을 함께하는 사람들을 만들어간다는 것이 나름 이해해본 인문학이다.”(김연설의 ‘고상한 삶’). 서로서로 멀어진 코로나19 시대 인문학의 시작과 끝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서소문공원의 ‘노숙자 예수’가 말을 걸어온다. “굶주린 자, 목마른 자, 헐벗은 자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박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