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최현철의 시선

[최현철의 시선] 미래 세대가 습격하기 전에

중앙일보

입력 2020.10.08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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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철 논설위원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신작 ‘테넷’은 한국에선 지난 8월 말 개봉했다. ‘인셉션’ ‘다크 나이트’ ‘인터스텔라’ 등 전작의 위용을 자랑하는 놀런 감독도 코로나의 벽은 넘기 어려웠나 보다. 40일이 넘도록 아직 관객 수 200만 명을 채우지 못했다. 그래도 달리 개봉하는 영화가 없어 롱런한 덕에 기자도 지난 연휴에 관람할 기회를 잡았다.
 
영화는 시간을 거스르는(인버전) 기술을 발견한 미래 세력이 현재로 돌아와 3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려는 것을 주인공 활약으로 막는다는 내용이다. 시간을 거슬러 미래가 현재에, 현재가 과거에 개입하려는 시도는 영화에선 자주 등장하는 소재다. 놀런은 난해한 물리학 개념(열역학 제2 법칙), 시원한 액션, 고집스러운 실사 촬영을 버무려 지루해질 틈을 막았다.

산불 장마 등 세계에 재앙 전조
탄소 감축 동의…‘하는 척’만
해외 석탄 발전 참여, 비난 자초

영화는 미래세력이 현재(그들의 과거)에 개입하는 이유에 대해 딱 한 마디 한다. “해수면은 상승했고, 강물은 말라버려서”라고. 기후변화로 닥친 지구의 위기를 조상을 멸해서 극복하겠다니…. 그럼 자신들은 존재할 수 있느냐(할아버지의 역설)는 질문에는 “일어난 것은 일어난다”는 말로 넘어간다.
 
놀런 감독의 상상력이 출발하는 지점은 기후변화로 망가진 지구다. 전작 인터스텔라에서도 기후변화가 불러온 식량부족 때문에 주인공이 지구를 대체할 행성을 찾아 우주로 떠난다. 지구 밖에서 새 행성을 찾든, 시간을 거슬러 선대를 멸망시키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생존을 도모하든, 가능성 유무를 떠나 극단적인 해결책을 모색해야 할 만큼 지구는 곧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 된다는 것이다. 전작이 나올 당시 이런 위기감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마음으로 공감하기에는 좀 멀었다. 그런데 올해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정도로 위기는 현실로 닥쳤다.
 
미국 서부는 올해 엄청난 산불에 시달렸다. 남한 면적의 5분의 1가량이 탔다. 샌프란시스코 하늘이 빨갛게 물들고, 연기와 재는 시카고 근처까지 날아갈 정도였다. 산림과 주택 등 직접피해만 23조원, 간접피해까지 포함하면 58조원으로 추산됐다. 이 지역에 여름 산불이 나는 것은 연례행사지만, 올해 유독 규모가 큰 것은 날씨가 더워졌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주 데스밸리 국립공원에선 섭씨 54.5도를 기록해 역사적 기록을 깼다. 뜨거우니 불이 더 잘 붙고, 바짝 마른 나무들이 불쏘시개가 되니 규모는 더 커졌다.


한반도엔 물폭탄이 떨어졌다. 역대급으로 무더울 것이란 예보가 무색하게 1973년 이후 가장 긴 장마가 지속됐다. 장마가 끝나자 초강력 태풍 3개가 연속해서 상륙했다. 이 역시 처음 있는 일이다. 동시베리아의 기온이 무려 38도까지 치솟은 영향으로 한반도 주변 기압배치가 평소와 달라진 결과다.
 
미국과 한국만 겪는 현상이 아니다. 전 세계가 미래에 일어날 것으로 예상했던 재앙의 전조를 실제 겪기 시작했다. 과학자들은 지난 100년간 0.74도 오른 지구 평균기온을 1.5도 상승에서 멈추지 못할 경우, 되돌릴 수 없는 상태가 될 것으로 예상한다. 2015년 세계 195개국이 모여 각자 자신들의 온실가스 배출 감축 목표를 담은 파리기후변화협정을 체결한 이유다.
 
하지만 공짜 점심을 먹겠다는 생각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지난해에는 미국이 “협정이 미국에 도움이 안 된다”며 탈퇴를 선언했다. 기후변화 위협은 사기며 미국 내 일자리 창출이 먼저라는 트럼프가 밀어붙였다.
 
미국만큼 배짱이 충분하지 않은 우리 정부는 ‘하는 척’으로 방향을 잡은 것 같다. 올해 말 유엔에 제출할 탄소 감축 이행계획에서 2030년 배출 예상량 대비 37% 감축하겠다는 기존 목표를 2017년 배출치 기준 24.4% 줄이는 것으로 바꿨다. 그런데 계산해보면 절대 감축량은 5억3600만톤으로 같다. 그린 뉴딜을 하겠다고 온 세상에 광고했지만, 탄소배출을 더 줄일 생각은 없는 것이다.
 
지난달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는 비공개 안건이 논의됐다. 베트남 석탄화력발전소 건설에 한전이 참여하는 것을 승인하는 내용이다. 당초 참여했던 중화전력공사가 탈석탄을 선언하며 포기한 지분을 한전이 인수하는 방식이다. 미국 GE도 사업에서 빠졌는데, 한전은 여기에 삼성물산을 끌어들였다. 한국 밖에서 배출되는 탄소는 한국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나 대신 상을 차려야 하는 누군가의 시선도 고울 리 없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6일(현지시간)“삼성생명과 삼성화재가 지난 10년간 석탄 관련 산업에 16조원을 지원해 그룹 이미지 악화로 이어지고 있다”고 꼬집었다. 계열사인 삼성전자에 대한 투자자들의 우려도 전했다. 이러다간 미래세대가 습격하기 전에, 누군가가 내 밥상 뒤엎겠다고 덤빌지 모르겠다.
 
최현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