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택트 한가위 - 내일 국군의 날, 김웅수 장군 회고록으로 본 6·25
당시 한·미 군 지휘부 비밀회의
북진 구상 미 상층부 반대로 철회
백선엽 장군 밑 제2사단장 지내
“철원 확보 위해 화살머리고지 사수”
김두한 “내 밑 청년들 국방에 써달라”
무작정 찾아와 요청, 애국심에 감탄
하지만 이틀 뒤 해당 계획은 전격 취소됐다. 김 장군은 “사령관의 계획이 미 상층부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한 것 같았다”며 “그 계획이 실현됐다면 휴전선이 북쪽으로 올라가 현재 어떤 모양이 됐을지 궁금하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철원평야를 수중에 넣기 위해선 백마산이 필요했고, 백마산을 위해선 여기에서 100m 떨어진 화살머리고지를 반드시 확보해야만 했다. 적의 집요한 공격으로 두 차례 이 고지를 빼앗긴 적도 있었다. 나는 어떤 대가를 치러도 철원평야를 확보하기 위해 백마고지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 화살머리고지가 절실했다.”
2018년 남북은 9·19 군사분야 합의를 체결하고 화살머리고지에서 공동으로 유해 발굴에 나서기로 했다. 여기엔 남북한 병력뿐 아니라 프랑스군, 중공군 등 참전국 병력 희생이 상당했다는 점이 영향을 미쳤다.
김두한을 실제로 만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는 김 장군은 그에게 “군인들에게도 무기가 부족한 데다 훈련 없이 애국심만 가지고 싸울 수도 없다”며 “후방의 소란을 막는 데 전력을 다해 달라”고 부탁했다. 김 장군은 “나는 실로 그 용기와 애국심에 감탄했다”고 그날의 강렬한 기억을 떠올렸다.
◆박정희의 난데없는 혁명 제안=김 장군은 전쟁 후 방대해진 군의 정치화를 비판적으로 보고 또 고민했다. 이즈음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1960년 육군 군수참모부장으로 재직하던 김 장군은 부산에 군수기지사령부를 창설하기로 하면서 자신의 차장 격인 사령관으로 당시 소장이던 박 전 대통령을 추천했다. 김 장군은 “청렴하고 열심히 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 한 번쯤 같이 근무하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김 장군은 박 전 대통령의 사령관 취임을 위해 동래여관에 함께 묵을 때 깜짝 놀랄 만한 제안을 받았다고 했다.
“오후 내방한 박 장군은 나에게 느닷없이 ‘각하! 혁명이라도 해야지 이대로 나라가 되겠습니까’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군인들이 혁명을 한다고 나라가 잘된다는 보장이 있느냐’고 반문했고, 그 이상 말은 진전되지 않았다.”
김 장군은 1961년 5·16 쿠데타 후 군에서 예편한 뒤 ‘반혁명’ 죄목으로 1년 가까이 복역했다. 그는 “5·16을 주도한 사람이나 반대한 자들은 각기 나름대로 국가관과 철학을 갖고 있었을 것”이라며 “나는 지금 다시 그 상황이 닥친다고 해도 같은 행동을 할 것”이라고 기술했다.
김웅수 장군
1923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만주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1945년 귀국, 서울대 법대 재학 중 국방경비대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한 뒤 1946년 졸업 후 참위(당시 소위 계급)로 임관했다. 이때 국군 창설에 기여했다. 6·25 전쟁 중 백선엽 장군의 지명으로 육군 제2사단장이 돼 화살머리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전쟁 후에는 육군본부 군수참모부장, 육군편제 개편위원장을 지냈다. 5·16 쿠데타 후 예편해 1972~93년 워싱턴DC 가톨릭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2018년 95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이근평 기자 lee.keunpyu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