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만리는 세종이 총애하던 집현전의 상징적 학자였다. 공인과 상인들이 흩어져 물가가 자주 뛰니 공업의 종류를 묶어 모여살게 하자고 건의해서 물가를 잡은 사람이 최만리다. 인사동 지필묵 거리, 을지로 가구거리 등이 그로 인해 생겨났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술고래인 최만리의 건강을 염려한 세종이 술을 석잔까지만 허용한다고 명령했다. 버릇을 못 고치자 세종이 꾸짖는다. 옆 사람이 대신 해명한다. “근자에 최만리는 큰 대접을 술잔으로 씁니다.”
최초로 모음에 ‘형태’를 부여
음절의 공간에 문자 채워넣는
발상의 전환 끝에 탄생한 혁명
지루한 시행착오 거쳤을 것
집현전의 천재들도 한글이 가져올 혁명적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다. 세기의 천재 폰 노이만도 최초의 고급 프로그래밍 언어인 포트란 개발 제안에 대해 그런 거 필요없다고 집요하게 반대했다. 천재라고 미래를 보는 시야가 넓은 것은 아니다.
알파벳은 기원전 20세기경에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발명되었다. 영어·위구르어·몽골어·티벳어·산스크리트어 등 대부분의 문자가 이로부터 변형되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자음의 나열로 이루어지며 모음은 식별 보조 기호 정도의 역할이었다. 예를 들어, 영어의 strike는 모음 없이 자음 3개로 단어를 시작하기도 한다.
음절은 나열의 결과로 생기는 것이었다. 한글은 음절의 공간을 미리 만들고 거기 문자를 채워 넣는다. 대단한 발상의 전환이다. 일본 문자는 모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8개의 자음을 모음 없이 다섯개씩의 다른 발음으로 나누었는데 이로 인해 기본적으로 40자 플러스알파가 되었다. 이 40자를 한글의 원리로 만들면 13자면 된다. 일본어는 그렇게 문자를 무더기로 만들고도 할 수 없는 발음이 많다. 자판도 불편하다. 중국어에 비하면 그나마 낫지만.
한글 창제의 주역을 신미대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도 한다. 영화 ‘나미’도 한몫했다. 예사롭지는 않다.
『성종실록』 중 한 대목이다. “종친과 늙고 병든 대신까지도 말에서 내려 걸어오는데 이 중은 말을 타고 궐문으로 들어오니 누가 통분하지 않겠습니까?”고 하니 성종이 “선왕께서 공경히 대접하던 중인데 다시 논하지 말라”고 답한다. 『문종 실록』엔 신미의 관교를 빼앗아야 한다는 건의에 “선왕께서 공경하던 중이니 빼앗을 수 없다”는 대목이 나온다. 『세조실록』엔 신미에게 정철 5만5천근, 쌀 500석, 면포·정포 각 500필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한글 창제 앞이든 뒤든 깊은 영향을 미친 대단한 승려였음은 틀림없다.
착상과 연구, 시행착오. 한글의 창제는 연구 개발의 표본적 프로세스를 밟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 같다. 『해례』 서문을 쓴 정인지에 의하면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발명했고, 그 정밀한 뜻이 묘해서 집현전 학사들은 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고 한다.
원래 복잡한 현상을 정리하는 방법이 간명할수록 일은 더 어려워진다. 우아하고 간명한 결과물의 탄생은 그것을 이루는 재료들의 질감과 그들의 어울림에 대한 몸으로의 느낌(체화) 단계까지 가지 않으면 힘들다. 잡스럽고 지루한 시행착오의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한글 창제의 역사를 가졌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운이다. 그런 프로세스를 후손들이 또 다른 분야에서 만들 수 있는 모범적인 선례다. 우리가 우연히 컴퓨터 자판을 수월하게 두드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문병로 서울대 컴퓨터공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