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남정호의 시시각각

[남정호의 시시각각] ‘한·미 평화동맹’이란 말장난

중앙일보

입력 2020.09.15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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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호 논설위원

현 정권 실세들은 묘한 표현으로 사안의 본질을 흐리는 데 능란한 듯하다. “한·미 관계를 냉전 동맹에서 평화 동맹으로 바꿔야 한다”는 이인영 통일부 장관의 최근 발언이 바로 그렇다. 언뜻 듣기에 그럴싸한 이 주장엔 그릇된 두 가지 시각이 배어 있다. 첫째, 기존의 한·미 동맹은 이념 대결로 얼룩진 냉전시대의 유물로서 청산돼야 하며 둘째, 따라서 향후 양국 관계는 군사 관계를 뺀 평화 추구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거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동맹의 본질에 무지하거나 아니면 의도적 왜곡일 수밖에 없다.
 
동맹이란 본디 전쟁 같은 무력 충돌을 전제로 맺어진 관계다. 적국과의 싸움에 대비, 전쟁 발발 시 우방국 또는 적의 적과 군사적으로 서로 돕기로 약속하는 게 동맹이다. 태생이 이럴진대 평화 동맹이 대체 무슨 소리인가. ‘사랑 폭탄’ ‘우정 탱크’가 우스꽝스럽게 들리듯 평화 동맹도 실소를 자아내는 말장난에 불과하다.

동맹은 무력 충돌을 전제로 한 관계
간섭받지만 안보 보장의 이득도 커
맹탕 만들려는 시도 좌시해선 안 돼

동맹은 예로부터 애용되던 안보 전략이다. 동맹을 맺으면 적은 군사력을 유지하더라도 전쟁 발발 시 몇 배의 화력을 동원할 수 있는 까닭이다. 국가 경영 차원에서 여간 남는 장사가 아니다. 유사 이래 거의 모든 나라가 동맹을 좇아 끊임없이 합종연횡(合從連衡)한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동맹에도 대가가 따른다. 원치 않는 동맹국 분쟁에 끌려들어갈 수 있다. 동맹국의 간섭도 골칫거리다. 특히 초강대국과 약소국 간의 비대칭적 동맹에서는 더 심하기 마련이다. 우리도 역사의 골목골목에서 미국의 간섭을 받아온 게 사실이다. 핵무기를 못 만든 것도, 미사일 사정거리를 늘리지 못했던 것도 죄다 미국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개입이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1973년 대한해협에서 수장될 뻔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살린 것도 미 중앙정보국(CIA)이었다.
 
어쨌든 이렇듯 간섭받는 대신 안전을 보장받는, 소위 ‘안보-자율성 교환 동맹’일지라도 전체적 득과 실을 따져 그 가치를 평가하는 게 옳다. 미국이 통일 문제를 포함해 한국 상황에 간섭해 왔다는 진보 세력의 지적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차돌처럼 단단해야 할 한·미 군사동맹을 별 알맹이 없이 그저 평화롭기만 한 북유럽 국가와의 관계처럼 만들겠다는 발상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우리 안보의 기틀을 무너뜨리는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우호 관계, 특히 67년간 이어져 온 한·미 동맹은 소중한 자산이다. 국가 간 신뢰라는 무형의 자산을 쌓아 왔기 때문이다. 공산권의 위협을 막기 위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소련 붕괴 후에도 유지된 것은 그간에 축적된 동맹 간 신뢰 덕분이었다. 군사적 상호 지원 외에도 단단한 동맹으로 할 수 있는 건 참으로 많다.


일부에선 50배 넘는 남북 간 경제 격차로 남쪽 군사력이 월등한데 무슨 동맹 타령이냐고 반문한다. 하지만 이는 북핵이 없을 때의 얘기다. 지난해 한반도선진화재단 연구에 따르면 미국의 핵우산이 없는 상황에서 북한이 핵무기를 활용한 단기속결전을 펴면 남북한 군사력은 1 대 1.9인 것으로 평가됐다. 북측 군사력이 거의 두 배라는 얘기다.
 
그런데도 이인영 장관이 평화 동맹 운운하는 이유는 뭘까. 바로 북핵을 위협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동맹을 더더욱 강화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이를 흔드는 말만 늘어놓을 리 만무하다.
 
최근 최종건 외교부 차관이 밝힌 한·미 외교부처 간 국장급 실무협의체인 ‘동맹 대화’ 신설 방침도 양국 관계에 깊은 흠집을 낼 사안이다. 2년 전 미국 주도로 만든 ‘워킹그룹’도 잘 안 돌아가는 판에 비슷한 조직을 만들겠다면 워싱턴 측에서 좋아할 리 없다.
 
국내 정치가 그렇듯 국제 관계도 살아 있는 생물이다. 한·미 동맹도 상대적 국력 차가 주는 데에 맞춰 조정하는 게 옳다. 하지만 그렇다고 북핵 위협 속에서 한·미 동맹을 맹탕으로 만들려는 움직임을 결코 좌시해선 안 된다.
 
남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