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허강국’ 대한민국…실상은 쓸모없는 장식ㆍ장롱특허 남발

중앙일보

입력 2020.09.13 17:31

수정 2020.09.13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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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박 62척이 5년 동안 만들어낸 유속과 유향에 대한 데이터를 이용해…’

지난해 A 국립대의 B 교수가 '빅데이터를 이용한 ○○기술 개발'이란 명목으로 낸 특허 내용이다. 이 기술은 특허등록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다른 연구자가 선박의 숫자나 연구기간을 조금 바꿔서 출원하면 마음껏 사용할 수 있다. 특허권 침해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특허권을 전혀 보호받을 수 없는 특허라는 충고를 들었지만, B 교수는 “그냥 등록만 해주시면 된다”고 답했다. B 교수에게 중요한 건 '특허다운 특허'가 아니라 '등록 실적'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국내 특허 무효율 46.1% 달해  

'특허강국' 을 자처하는 대한민국에 장롱특허·장식특허가 난무하고 있다. 출원·등록되는 특허는 많지만 쓸모없는 게 많다는 얘기다. 지난 2일 유엔(UN) 산하 국제기구인 세계지식재산기구(WIPO)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특허출원 수는 세계 1위다. 매년 21만~22만건의 특허가 출원된다. 중국과 미국·일본에 이어 세계 4위 수준이다. 하지만 많은 전문가는 한국이 특허 다출원 국가이지 특허 강국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특허청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특허 무효율은 46.1%에 달한다. 특허 등록이 됐는데도 무효 소송에 걸리면 절반 가까이는 취소된다는 얘기다. 특허 무효율이 20%대인 미국·일본 등에 두 배 수준이다. 출원 신청되는 특허 수준도 낮다. 대학이 특히 그렇다. 대학알리미에 따르면, 국내 대학이 출원 신청한 특허 10건 중 4건은 등록이 안 된다. 한 대학의 지식재산권 담당 관계자는 “국내 대학의 특허 출원은 미국 유수 대학보다 많은데 정작 등록으로 이어지는 비율과 기술이전 수입료는 훨씬 낮다”며 “부실한 연구 성과를 감추기 위한 부실특허 출원이 많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장롱특허’도 많다. 한국지식재산연구원이 지난해 말 발표한 '정부 R&D 특허관리 현황 및 시사점‘에 따르면 국내 대학과 공공연구기관의 특허 활용률은 33.7%에 그쳤다.  
 
원인은 많다. 전문가들은 ‘실적 쌓기용 특허 남발’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대학·공공연구소의 연구·개발(R&D) 성과를 특허 건수 등 양적으로만 평가하다 보니 장식·장롱특허만 쌓인다는 것이다. 부실한 특허심판과 지식재산을 제대로 관리·평가할 수 있는 시스템이 미흡하다는 것도 오래 묵은 지적이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실적 쌓기용 특허와 낮은 출원비용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외국보다 턱없이 낮은 특허 출원비용이다. 지난해 말 심영택 뉴욕주립대 교수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특허출원 한 건당 대리인 비용은 정부·대학이 평균 116만원, 기업이 167만원이다. 대학만 놓고 보면, 미국은 평균 900만원, 일본과 태국은 각각 356만원, 401만원이다.
 
낮은 출원비용이 질 낮은 특허를 양산하는 문제는 정부도 잘 알고 있다. 특허청이 2018년 10월 ‘국유특허 대리인 비용 가이드라인’을 제정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난해 초에는 가이드라인을 정부뿐 아니라 대학과 공공연구소로 확대 적용했다. 하지만 이 가이드라인은 권고에 그쳐 실효성이 낮다. 이에 대해 홍장원 대한변리사회 회장은 “입법예고 중인 국가연구개발혁신법 시행령에 최소한의 특허품질을 담보할 수 있는 수가(단가)나 최소 업무수행 시간 등을 추가해 법제화할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윤선희 한양대 로스쿨 교수는 “특허 품질 향상을 위해서라도 가격 덤핑보다는 제값을 주고 양질의 서비스를 받는 구조로 나아갈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다.

 
김태윤 기자 pin21@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