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때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영의정 김재로의 발언입니다. 조선에서 병역이 양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죠.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말한 김재로의 발언이 못마땅했던 걸까요. 영조는 이렇게 대꾸합니다. “지금 여러 신하들의 후손도 군역을 면하지 못하게 되는 날이 오지 않는다고 어찌 장담하겠는가?”
영조의 발언에는 미묘한 뉘앙스가 담겨 있습니다. 조선 전기만 해도 양반도 병역에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랬던 병역제도는 양반들의 입맛에 따라 수 차례 바뀌었고, 영조 때 이르러서는 양반의 면제가 당연시되는 상황까지 왔던 것이죠.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병역제도의 문란은 국방의 약화는 물론 국가의 존망을 위협하기도 했습니다.그렇다면 조선은 왜 이토록 병역이 문란해졌을까요.
[픽댓] 히스토리
양반은 어떻게 병역을 피했나
태종 13년(1413년) 충청도 관찰사였던 이안우가 “지금 군에는 현직 관료와 의정부 대신들의 자제가 소속되어 있다”고 보고했던 것을 보면, 양반 역시 병역을 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 전기에도 병역을 기피하는 풍조는 있었고, 양반들은 합법적으로 군대를 피하는 방식을 적극 활용했습니다.
첫째는 성균관이나 지방의 서원에 등록돼 유학(儒學)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정부의 인정을 받는 길입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성균관은 200명, 그 외 서울 지역의 교육기관 400명, 지방 서원 14950명 등 총 15550명이 이런 이유로 병역에서 빠졌습니다. 이 때문에 성균관과 서원에 들어가는 것은 경쟁률이 높았고, 온갖 연줄을 동원하기도 했습니다. 아무래도 고위공직자와 지방 유지의 아들이 들어갈 확률이 높았죠.
참고로 군역은 양인이 진다는 의미에서 양역(良役)이라고도 했는데, 성균관이나 서원에 소속되지 않은 채 군역을 지지 않는 사람을 한량(閑良)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름만 군인이지 훈련은 없었고 정원도 정해지지 않아 남들보다 편하게 군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도 저도 안 될 경우엔 갑사(甲士)나 별시위(別侍衛) 같은 무관직으로 들어가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갑사와 별시위는 수도 서울에서 편성하는 특수 정예군으로 일종의 사관학교 같은 기관이었습니다. 갑사는 혜택이 많았습니다. 합격하면 5품~8품 직급에 토지와 월급도 나왔습니다. 또한 근무일수를 마치면 종4품에 해당하는 다른 관직으로 이동도 가능했습니다.
특혜가 많으니 양반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았습니다. 정예군을 뽑는만큼 선발절차가 까다롭다보니, 일부 양반은 사람을 사서 대리시험을 치도록 했습니다. 무예가 뛰어난 한 사람이 수험생 10명의 시험을 대신 봐줬다는 기록도 있으니, 온갖 꼼수가 난무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조선 중기 이후 갑사에 대한 특권이 축소되면서, 나중엔 정원조차 채우기 어려워집니다. 이때문에 유성룡은 1594년 올린 상소에서 “『경국대전』에서 갑사의 정원을 1만4800명으로 정해놓았지만 현재 인원은 4640명에 불과하고, 이마저도 장부상에만 등록되어 있을 뿐 실제로는 동원하기도 어렵다”라고 탄식하기도 했습니다.
양반이 피한 군역의 짐은 서민층으로
이웃집에서 경제적 보조를 받아도 생계활동을 놓는다는 것은 매우 불편한 일이었습니다. 특히 지방에 거주하는 경우에는 더욱 고단했습니다. 정병은 16개월마다 2개월씩 서울에서 올라와 복무해야 했는데, 임진왜란 전까진 거의 전쟁이 없었기에 토목공사에 불려다는 일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정병은 다시 기병(騎兵)과 보병(步兵)으로 나뉘었는데, 기병으로 차출된다면 더욱 곤란했습니다. 조선은 군장을 사비로 충당하도록 했기 때문에 지방에서 서울까지 말을 끌고 올라와 관리하는데 돈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서울에서 말을 빌려주거나 대신 근무할 사람을 알선해주는 ‘에이전트’가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기병(騎兵)이라는 것이 대개 타는 말이 없고 시위(侍衛)할 때에 이르러서야 남에게 빌어서 창졸간에 준비하는데, 구하지 못하면 걸어서 따릅니다. 또한 소위 보병(步兵)이란 것은 겨우 서울에 들어오면 모두 토목(土木)의 역사에 나아가고 한 사람도 시위(侍衛)하는 자가 없게 되니, 이름은 비록 군사라고 할지라도 실상은 역졸(役卒)입니다. 그 노고(勞苦)를 견디지 못하면 사람을 사서 대신하게 하므로 두어 번 한 뒤에는 가산이 탕진하여 민간이 소연(蕭然) 하게 되니, 이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성종실록 성종 4년 10월 2일)
이 때문에 군대에서 탈영을 하거나, 군역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머리를 깎고 중이 되거나, 스스로 권세가의 노비로 들어가 천인으로 신분을 바꾸기도 했습니다. 조선 초 멸시의 대상이었던 승려가 되기 위해 승려 신분증인 도첩(度牒)을 사들이는 일도 벌어지는 등 심각한 부작용이 있었습니다.
“근래에 군(軍)에서 도망하고 부역(賦役)을 피하여 머리를 깎고 중이 된 자가 몇 천명 몇 만명이 되는지 알 수 없는데, 군액(軍額)과 농민이 이로 인하여 감소하고 앉아서 먹는 자가 많으니, 그 일곱입니다.” (『성종실록』 4년 10월 2일)
훈련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고, 사기는 낮았으니 임진왜란 초기에 연이은 완패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양반의 집요한 병역기피
앞서 성균관이나 서원에 등록되면 병역을 면제받는다고 했는데, 국가에서도 나름 보완책이 있었습니다. 경서를 외우고 풀이하는 고강(考講) 이라는 테스트를 통해 정기적으로 학생들을 밀어냈습니다. 테스트에 불합격하면 군역을 지게 한 것이죠. 이 또한 온갖 연줄이 동원됐습니다.
조선 명종 때 경북 성주에 이문건이라는 인물이 남긴 일기를 보면 ‘어쩔 수 없이 해주긴 하지만 이다지도 청탁이 많냐’고 탄식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승지(정3품)까지 올랐다가 갑자사화 때 고향으로 내려왔는데, 고위직 출신이라 지역에선 ‘끗발’이 통하는 편이었습니다.
그가 뒤를 봐준 많은 사람들 중 이훈경 형제는 군 기피 풍조를 잘 보여줍니다.
서원에 들어가지 못했던 이훈경은 맹인인 형을 보살피는 시정(侍丁)이 되겠다고 신청합니다. 조선시대엔 형편이 어려운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예외적으로 군역(軍役)에서 면해주곤 했습니다. 자녀만 자격이 주어졌기에 이훈경은 해당되지 않았지만 지방 공무원의 협조를 받아 결국 시정이 됐습니다. 그 동생 이익경은 서원에 들어가긴 했는데 고강에 합격하기 위해 이문건을 두 차례 찾아와 청탁을 부탁했습니다.
그나마 이런 꼼수라도 쓴 것은 조선 전기까지입니다. 조선 후기부터는 양반들이 아예 병역에서 빠지게 됩니다. 꼼수가 관행이 되고 관행은 제도처럼 자리를 잡은 것이죠.
병역의 부담을 떠맡은 양인층의 피해와 이로인한 국가적 손실이 커지자 조정은 여러 차례 군제 개혁을 추진하려 했지만 양반들의 저항으로 쉽지 않았습니다.
“영의정 심지원이 아뢰기를, ‘갑작스레 사족(士族)들에게 군포를 징수해서 전에 없었던 일을 새로 만들어 놓는다면 혹시 이 뒤에 원망하고 괴로워하는 폐단이 있을까 염려스럽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만약 원망과 고통으로 따져 말한다면 도망자와 죽은 자의 원망과 고통이 사족들의 원망과 고통에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니… 다시 지원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가 유지되는 것은 바로 사대부의 힘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루아침에 갑자기 일찍이 없었던 일을 만들어 서민들과 똑같이 군포를 징수한다면 그 원망 소리 또한 크지 않겠습니까.’”(『효종실록』 10년 2월 13일)
조선의 군사제도는 ‘복마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문제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양반들의 병역 기피가 여론을 악화하고 국력을 소진하는데 주요 원인이 된 것도 분명합니다.
조선이 일본에게 나라를 내줄 때 정규군이 전투 한 번 제대로 치러보지 못했던 비참한 역사를 되새긴다면 고위층의 병역 문제는 아무리 철저하게 따져봐도 지나치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유성운ㆍ김태호 기자 pirat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