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도 일본 사회 전반의 기류가 바뀌었다는 점을 냉정하게 인식해야 한다. 과거 일본 정치를 설명할 때 ‘진자(振子)의 법칙’이란 게 있었다. 시계추가 좌우로 움직이듯 일본 유권자들의 표심이 한 번은 보수 우파, 다음 선거는 리버럴(혹은 진보)로 왔다갔다 한다는 것이다. 자민당 안에서도 온건 리버럴과 강경 매파가 균형을 이룬 게 파벌정치였다. 하지만 지난 20여 년 새 진자의 중심축 자체가 크게 오른쪽으로 이동한 결과, 추의 방향과 진폭은 무의미해졌다. 자민당은 대표적 매파인 세이와카이(淸和會·현 호소다파)의 독주로 굳어지면서 파벌 간의 색깔 차이도 사라져 버렸다. 합리적이고 겸허한 과거사 인식의 소유자나 개헌 당론에 반대하는 정치인은 설 땅이 없다. 야당은 더욱 지리멸렬이다. 그러니 아베가 물러나도 제2, 제3의 아베가 나올 수밖에 없다. 그게 지금 일본 정계의 현실이고, 사회 전반의 분위기다. 이른바 ‘주류 교체’가 확고히 실현된 것이다. 일본과 싸워서 끝장을 보려 하든, 대화로 문제를 풀고 화해하려 하든 일단은 이런 일본 내 사정을 정확히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아베 물러나도 반한 기류는 여전
스가는 위안부 합의 번복에 실망
지도자의 용기만이 이 상황 타개
이처럼 한·일 양국 정부 사이에는 헤어나기 힘든 불신의 늪이 가로놓여 있다. 영원히 척지고 살 요량이라면 상관없지만, 그게 아니라면 양국 지도자가 나서서 타개하는 수밖에 없다. “네 탓이오”라며 상대방 입장이 바뀌기만을 기다릴 게 아니라 내가 먼저 바뀔 수 있다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제2, 제3의 아베가 나와도 끌어안고 가야 한다는 얘기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국내의 반일 감정이 만만치 않던 1998년, 과거사를 극복하고 미래지향적 관계로의 변환을 담은 한·일 파트너십 선언을 채택하고 일본 대중문화를 개방했다. 집권 이전부터 오랫동안 가다듬어 온 소신에서 비롯된 것이었겠지만, 이를 실천으로 이끈 건 반대 여론을 직접 설득하겠다는 용기와 가시밭길 협상을 우직하게 이어간 인내심이었다. 일본의 새 정부 출범은 문재인 대통령에게도 용기와 인내심을 발휘하는 계기를 제공할 수 있다.
예영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