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5주년 한수산의 기록-일제 강제동원, 빼앗긴 가족들 ④
※편집자의 말
“저쪽이 조선이다.”
한수산 작가의 소설 『군함도』는 일본에 끌려간 징용공의 이 말로 시작한다. 중앙일보 광복 75주년 기획 ‘일제 강제동원, 빼앗긴 가족들’은 징용공이 그토록 그리워 했던 ‘저쪽 조선’에 남았던 아들딸들의 이야기다.
그의 소설 속에서 목숨을 걸고 군함도 탈출을 시도한 조선인들은 징용공이기 전에 아버지였다. 27년간의 조사와 고증 끝에 군함도로 끌려간 아버지들의 사투를 소설로 완성한 한수산 작가가 이제 남겨졌던 강제 동원 피해자 아들딸들의 생존기를 중앙일보에 기록한다.
'그런 데 갔다 왔다'는 이유로
엄마는 본처 있는 남자 소실로
또래보다 한참 늦게 혼담 들어와
두 번의 파경, 온갖 일하며 딸 키워
조리사로 엄마와 나눔의 집 생활
일본 사죄 못 받고 떠나신 게 한
납골당 사진 보며 말없이 묻는다
그곳에서 이제 편안하시냐고…
위안부 피해자의 딸 임명옥씨
박옥련이 생전에 남긴 증언에 따르면 1919년 4월 전북 무주에서 태어난 그녀는 1942년 남태평양 파퓨아뉴기니로 끌려갔다. 일본군 9만 명이 주둔했던 섬 라바울에서 위안부로 있었다. 귀국하던 배가 두 번이나 깨져 사경을 헤매다 44년 돌아온다.
귀국 후 결혼을 하지만 그 결혼은 가정이 있는 남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사는 소실이었다.
“엄마가 그런 데를 갔다 왔으니 애는 못 낳을 것 아니냐, 본처가 몸이 좀 불편한데 아들 둘이 있으니 애들이나 잘 키우면 된다, 그렇게 얘기가 돼 첩으로 들어갔던 것 같아요.”
딸 임명옥(71)씨는 훗날 이모한테 들은 이야기라고 했다.
“그런데 들어가자마자 엄마가 오빠를 낳고 제 밑의 동생까지 낳았던 거예요. 저야 아무 것도 모르고 컸지요. 어린 제가 뭘 알았겠어요.”
군청의 공무원이었던 자상한 아버지와 큰엄마(본처), 이복오빠 둘, 거기에 엄마의 아이 셋까지. 임명옥은 8식구 속에서 별다른 풍파 없이 자랐다. 열 살이 돼서야 입학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녀는 중학교가 아니라 편물학원을 택했다.
23세가 된 가을, 당시로는 늦은 결혼을 한다. 서해안의 소래포구 염전에서 일하는 남자였다. 임신 기미가 없이 지내던 끝에 남편이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와중에 시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진다.
“애라도 낳아 기르고 싶은데 정 붙이고 살 게 없으니, 제가 홀딱 뒤집어지면서 남편이 미워지기 시작하는데, 못 살겠더라고요. 집을 나왔어요.”
첫 결혼은 그렇게 파경을 맞았다. 혼자 지내던 28세, 안동 김씨 양반집 막둥이라며 중매가 들어와 재혼을 했는데, 하자마자 애가 들어섰다. 그렇게도 갖고 싶던 아이, 딸을 낳았다. 그러나 남편이 문제였다. 생활력도 없는 데다 의처증까지 있어 괴롭힘 속에서 딸 하나를 보며 견뎌냈다.
딸이 취학 연령이 되자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일곱 살 딸아이를 데리고 무주의 친정으로 돌아갔다. 두 번째 결혼도 그렇게 끝이 났다.
“저는 일을 해야 먹고사니까 애를 친정 엄마한테도 맡겼다가, 올케한테도 맡겼다가…. 저 하나로 식구들이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겠어요.”
임명옥씨는 음식 솜씨가 좋은 사람이었다. 무주에서 차린 통닭집에 손님이 몰리며 당시로서는 큰돈도 모았다. 그러나 딸이 중3이 됐을 때 통닭집을 정리하고 대전으로 나왔다. 도시로 가 딸을 잘 길러야 한다는 모성의 간절함이 내린 결단이었다.
터미널 다방의 주방일도 보고, 거기서 배운 게 있어 다방을 차리기도 했다. 파출부를 다니다 돈이 더 많은 공사장까지 오가며 딸을 키웠다.
1995년 4월 박옥련은 서울 혜화동 나눔의 집으로 입소한다. 이 시절은 임명옥씨의 삶에도 중요한 변곡점이 된다. 함께 집회를 나가고, 증언을 하고, 투쟁하는 엄마들을 바라보는 임명옥씨에게도 각성이 찾아온다.
내가 엄마를 부끄러워해야 할 일인가. 엄마들은 죄가 없다. 일제 강점기 피해자라는 불행을 넘어 이제는 여성의 인권을 위해 싸우는 엄마들이 아닌가. 나눔의 집이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에 건물을 세우자 엄마도 그곳으로 이주한다.
일본 정부는 95년 7월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국민기금’(이하 국민기금)을 설립, 각국의 위안부 피해자에게 위로금을 지급하겠다고 발표한다. 피해국들에선 반대운동이 일어난다. 피해자들은 국민이 모금한 위로금이 아니라 ‘일본 정부의 법적 배상’을 원했다.
96년 10월 한국에선 피해자 지원을 위한 범국민 모금이 시작됐고, IMF 외환위기 속에서도 12억원이 조성됐다. 정부는 여기에 예산을 더해 98년 5월부터 생활안정지원금으로 4300만원을 지급한다. 박옥련이 받아 자식들에게 나눠 준 게 이 돈이다. 정부는 이때 피해자들에게 국민기금을 받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았고, 공식적으로 국민기금을 받은 7명은 수령자에서 제외했다.
사실 일본 국민기금 측은 7명을 포함해 총 61명에게 기금을 지급했다고 한다. 거부하는 피해자들을 회유하는 등 비열한 방법으로 극비리에 기금 지급을 강행했고, 피해자들 사이에 불신과 갈등이 깊어졌다. 각서를 쓰고도 기금을 받은 피해자 한 분은 자책감에 시달리다 돈의 출처를 밝히지 않고 5000만원을 공익재단에 기부하기도 했다.
대학에 진학한 임명옥씨의 딸은 복학생 남자친구와 캠퍼스 커플이 돼 99년 4월 뉴질랜드로 유학을 떠났다. 그 딸에게서 외손녀를 낳았다는 소식이 온다. 남편을 뒷바라지하며 자신은 학업을 포기했던 딸이었다. 임명옥씨는 뉴질랜드로 가 산후조리를 도우며 두 달을 보냈다.
그리고 돌아오던 길, 비행기에 오르며 터져 나온 눈물이 인천공항에 내릴 때까지 그칠 줄을 몰랐다. 대전 집으로 돌아와 아무도 없는 집에 털썩 주저앉았을 때 또 울음이 터져 나왔다.
얼마 후 허전한 마음을 달래려고 엄마를 찾아간 나눔의 집에서였다. 어머니와 함께 살며 조리사로 일해 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나야 너랑 있으면 좋지만 저 할매들 등쌀을 이겨내겠느냐”는 엄마의 염려가 있었지만 엄마를 모시고 함께 살자는 결심이 앞섰다. 임명옥씨는 2000년 5월 나눔의 집 조리사로 들어갔다.
2011년 봄 박옥련이 세상을 떠난다.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위한 긴 싸움이 아무 결실도 못 보고 떠나는구나. 그것이 한스러웠다.
엄마는 오빠가 있는 대전의 시립공원묘지에 모셨다. 소장의 도움으로 1급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딸 수 있었던 그녀는 엄마가 떠난 후에도 나눔의 집에서 요양보호사로 일하다 2017년 정년퇴직했다. 엄마와 함께 살자고 시작한 세월이 거의 20년, 덧없이 흘러가 있었다. 엄마와 오빠가 있는 옆에서라도 살려고 대전에 터를 잡았다.
요즈음은 혼자 시립공원묘지를 찾는 발길이 더 외롭다. 납골당을 살펴보며 소리 없이 묻는다. ‘엄마 이제 편안해?’ 200살까지 살겠다던 엄마는 말이 없다. 눈가를 훔치며 돌아서자면 아직도 흘릴 눈물이 남아 있는가 싶다.
비극의 바닥에 도사린 것은 ‘한 가족을 파멸시킨 일본’이다. 일제 강점기 가장 참혹한 피해의 여진(餘震)속에 살아야 했던 위안부 피해자의 딸, 피할 수 없었던 불행의 대물림이었다. 마지막 인터뷰를 끝내며 그녀가 말했다.
“제가 얼마나 낙인이 많이 찍힌 사람이에요. 위안부의 딸에 첩의 딸, 거기다 이혼녀에 또 혼자 살고 있으니, 씻을 수 없는 한을 안고 사는 저예요. 이런 이야기를 하고 나면 저는 오늘 저녁에 청심환 먹어야 자요. 가슴은 다 썩어 문드러지고, 명이 기니까 어쩔 수 없이 그걸 이겨내려고 참고 살았지. 제 속은 어떤지 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