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철재의 밀담

[이철재의 밀담] 국방장관은 군인일까, 민간인일까

중앙일보

입력 2020.09.02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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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재 군사안보연구소장

지난해 1월 23일 정경두 국방부 장관은 기자실에서 신념 간담회를 열었다. 간담회 도중 갑자기 정 장관은 쪽지를 받았고, 보좌관은 그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정 장관은 표정이 굳더니 자리를 급히 떴다. 1시간 후 그가 왜 급하게 나갔는지 밝혀졌다. 그때 일본 해상초계기가 해군 구축함을 상대로 위협 비행을 하던 중이었다. 그래서 정 장관은 합동참모본부 지하 지휘통제실(지통실)로 내려갔다. “정 장관이 상황을 통제했다”는 게 국방부의 당시 설명이었다.
 
하지만 정 장관이 도착하기 전 박한기 합참의장이 이미 관련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일본 군용기가 아군 군함 위를 스치듯 날았지만, 우방국인 일본이 본격적 군사 행동을 할 리 만무했다. 남북한 간 무력 충돌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과는 달랐다. 일각에서 정 장관이 지통실에 간 게 박 의장의 작전 지휘를 방해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문 대통령 ‘문민장관’ 공약 무산
국방장관은 군인 아닌 국무위원
군사작전 넘어선 국방정책 책임
군사작전은 지휘관에게 맡겨야

정 장관의 지통실 행은 처음이 아니다. 큰 산불이나 홍수가 일어나면 정 장관은 지통실에 들렀다. 멧돼지가 휴전선을 넘나들며 아프리카돼지열병을 옮긴다는 우려가 나와도 지통실을 찾았다. 이를 두고 정부 소식통은 “정 장관뿐만 아니라 역대 군 출신 국방장관은 자신을 행정부 장관이라기보다는 지휘관 또는 사령관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며 “그렇다 보니 국방장관으로 챙겨야 할 전략과 정책을 소홀히 하는 장관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플로랑스 파를리 프랑스 국방장관(왼쪽)과 안네그레트 크람프-카렌바우어 독일 국방장관이 프랑스군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두 사람은 정치인 출신이다. 문민통제 전통이 강한 유럽에선 여성 국방장관이 꽤 있다. 독일·프랑스에선 연이어 여성 국방장관이 나왔다. [AFP=연합뉴스]

그런데도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서욱 육군참모총장을 다음 국방장관으로 지명했다. 정 장관은 합참의장에서 바로 장관으로 발탁됐다. 그의 전임자인 송영무 전 장관은 해군참모총장을 지냈다. 현역 신분인 서 후보자까지 장관이 된다면 문 대통령의 ‘임기 내 문민 국방장관 임명 추진’ 공약은 물 건너간 셈이다. 문 대통령의 임기가 2년도 안 남은 데다, 민간인 국방장관을 내더라도 임기 말이라 힘없는 장관으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문민 국방장관은 문민통제에서 나왔다. 문민통제는 국가의 군사·국방 정책에 관한 전략적 의사결정을 직업 군인이 아닌 민간인이 내린다는 원칙이다. 군은 외부로부터 국가를 보호하지만, 안으론 국가를 위협해선 안 된다. 그래서 문민(민간인)이 군 위에 있어야 한다는 논리다. 더 나아가 문민은 국방정책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본다. 국방정책은 외교안보 전략의 한 갈래며, 예산 등 국가 자원의 배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 프랑스를 승리로 이끈 조르주 클레망소 총리는 문민통제의 필요성에 대해 “전쟁은 군인들의 손에만 맡겨 두기에는 너무도 중요한 문제”라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민간인 국방장관은 모두 5명이 있었지만, 11대 현석호 장관(1961년 1~5월) 이후로 맥이 끊겼다. 이후 현역 출신이 아니면, 전역 장성이 국방장관 직을 꿰찼다. 6·25 전쟁과 5·16 군사정변, 12·12 군사반란을 겪은 뒤 민간인은 군과 국방을 잘 몰라 국방장관을 맡길 수 없다는 인식이 굳어졌다. 문 대통령이 문민통제라는 민주주의 원칙을 되살리려는 목적에서 문민 국방장관 공약을 내걸었을 거다.
 
국방장관은 예산·인사·보급 등 군 행정에 관한 군정권과 함께 작전명령을 내릴 수 있는 군령권을 갖는다. 군령권이 있다고 국방장관이 군사 작전을 짜고 명령하는 것은 아니다. 합참의장을 비롯한 군 지휘관이 세부적 내용을 챙기면 된다. 국방부 기조실장을 지낸 김정섭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군에게 군사작전을 맡기는 것은 전문성과 효율성 측면에서 위임하는 것이지, 군사 분야 자체가 국민의 통제에서 벗어난 영역이라는 의미는 아니다”고 강조했다.
 
국방장관은 더 큰 그림을 그리는 게 주요 임무다. 50만 병력과 50조원 국방비를 관리하는 행정부의 책임자이자,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참석자로 국가 외교안보의 한 축을 담당한다. 익명의 군 관계자는 “군인 출신 국방장관은 출신 군과 병과를 외면할 수 없다. 그러다 보면 군 내부 타협에 따라 전력증강 사업이 ‘나눠먹기’로 끝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문민 국방장관은 이번에도 불발됐다. 여권 관계자는 “군 출신 장관들이 당장 군을 잘 통제하고 있고 큰 문제가 없으니 정치적 부담을 갖고 추진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귀띔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최근 차질을 빚고 있는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전환을 밀어붙이기 위해 구체적인 실무를 챙겨본 서 후보자를 임명했다”고 말했다. 정치적 계산 때문에 문민 국방장관을 뒤로 물렸다는 뜻이다.
 
세상은 달라졌다. 문민 국방장관과 군 지휘관의 역할 분담은 더 나은 국방정책을 세우고 집행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청와대가 국방장관 역량을 갖춘 민간인을 찾지 못했다면 진영 논리로 좁아진 인재풀을 탓해야 한다.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용기가 나지 않아 길을 떠나지 못하면 어리석은 행동이다. 대가 끊긴 지 반세기가 넘었는데 못 미덥다고 문민 국방장관을 임명하지 않는 것 마찬가지다.  
 
이철재 군사안보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