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후월드] 독극테러·시력 잃고도 더 세졌다···나발니의 反푸틴 12년

중앙일보

입력 2020.08.30 05:00

수정 2020.08.30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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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독재 정권은 끝나기 마련이다. 러시아도 곧 끝난다”(2017년 4월, 알렉세이 나발리, 영국 가디언 인터뷰)
 
러시아의 ‘살아있는 권력’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 10년간 쉼 없이 직격탄을 날린 사나이가 있습니다. 주인공은 러시아의 대표적인 반(反)푸틴 야권 인사 알렉세이 나발니(44).
 

러시아의 대표적인 반(反)푸틴 야권 인사인 알렉세이 나발니(44)가 독극물 테러를 당해 의식불명 상태인 것으로 전해졌다. 나발니의 대변인인 키라 야르미슈는 20일(현지시간) 트위터를 통해 ’나발니가 (시베리아의) 톰스크 공항 카페에서 차를 마신 뒤 모스크바로 돌아오던 비행기 안에서 쓰러졌다“며 ’누군가 그의 차에 독극물을 넣은 것 같다“고 밝혔다. [AP=연합뉴스]

 
푸틴 정권의 눈엣가시 나발니가 다시금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지난 20일(현지시간) 러시아 시베리아 톰스크에서 모스크바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쓰러진 뒤 의식불명 상태에 빠지면서입니다. 
 
독일 병원은 그의 체내에서 살충제 성분이 발견됐다고 발표했는데요. 여러 차례 나발니를 탄압해온 푸틴 정권이 이번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변호사를 가장한 반부패 운동가 

나발니의 정치 행보는 1999년 시작됩니다. 대학에서 금융과 법을 전공한 뒤 돌연 러시아 통합민주당인 야블로코당에 들어가면서입니다.  
 
그는 소위 ‘튀는’ 당원이었습니다. 좌익 성향의 당에 소속된 채로 극우세력 시위에 참석하고 반이민정책을 옹호해 당과 갈등을 빚었습니다. 결국 2007년 당에서 쫓겨나면서 홀로서기를 합니다. 
 

2019년 8월 촬영한 알렉세이 나발니 가족. 오른쪽부터 나발니의 아내 율리아, 나발니, 딸 다리아, 아들 자크하. [AP=연합뉴스]

 
당에서 나온 나발니는 평범한 변호사로 활동합니다. 하지만 그건 연막작전일 뿐. 2008년 11월, 개인 블로그를 개설하며 본색을 드러냅니다.  
 
블로그에 국영 기업과 대기업의 비리를 폭로하는 글과 자료를 쏟아내기 시작한 건데요. 나발니는 회사 주식을 사들여 주주가 된 뒤 기업 기밀 정보에 접근하는 방식으로 비리를 캐냈습니다. 겉으로는 변호사인 척하면서 뒤로는 은밀한 반부패 운동가로 활동한 겁니다.
 
국영 석유기업 로스네프트, 국영 가스기업 가스프롬, 대형 은행 VTB까지 거대 기업들이 표적이 됐습니다. 그는 기업 간부의 공금 횡령부터 그들 가족의 금융 비리까지 대기업 관련 부정부패 리스트를 낱낱이 공개했습니다.
  

2020년 2월 모스크바 시내에서 열린 보리스 넴초프 러시아 전 야권 지도자 추모행진에 참가한 나발리. 넴초프는 2015년 2월 크렘린 근교에서 암살 당했다. [AFP=연합뉴스]

 

푸틴으로 향한 화살 “사기꾼과 도둑들” 

폭로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당초 기업에 맞췄던 초점을 푸틴 정권에 정조준하며 판을 키웠죠.
 
그는 라디오 인터뷰에서 “푸틴이 속한 통합러시아당은 사기꾼과 도둑들의 모임”이라고 독설을 날리더니 “통합러시아당이 공약을 지키지 못했다”, “푸틴의 선거운동조직이 불법으로 국부 자금을 사용하고 있다”며 날 선 비판을 이어갔습니다.
 
2011년 11월 열린 러시아 총선은 반정부 세력을 키운 화약고가 됐습니다. 나발니는 총선에 푸틴이 개입했다는 정황을 들이대며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시민들은 나발니의 거침없는 폭로에 환호했습니다. 온라인에서 시작한 나발니의 반정부 운동은 거리 시위로 번졌고, 모스크바 시내에서 열린 시위에만 1만 명이 집결했습니다.

2018년 1월 러시아의 야권 인사 알렉시아 나발리가 수도 모스크바에서 열린 반정부 시위를 이끌고 있다. [AP=연합뉴스]

 
나발니가 본격적으로 정권 교체에 도전한 건 2013년 모스크바 시장선거입니다. 통합러시아당 출신 세르게이 소비야닌에게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푸틴이 공개 지지한 소비야닌은 지지율 70%가 넘는 거물급 정치인입니다. 나발니는 선거일을 한 달 반 앞두고 뒤늦게 출마하고도 27%의 지지를 끌어냈습니다. 전문가들은 비록 선거에서 졌지만 사실상 나발니가 소비야닌을 압도했다고 평가했습니다. 
 

독극물 테러·금융 탄압…푸틴 정권의 반격 

러시아 정가는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무소속의 30대 젊은이가 푸틴 정권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셈이니 말입니다.  

2019년 12월 러시아 경찰이 나발리가 설립한 반부패재단 FBK에 수사를 이유로 들이닥치자 나발리가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푸틴 정권은 반격에 나섰습니다. 나발니가 과거 키로프 주(州) 법률 고문으로 일할 때 국영 목재소의 공금 1600만 루블(약 5억6000만원)을 횡령했다는 의혹을 제기했고, 긴 법정 다툼이 이어졌습니다. 나발니는 “조작되고 거짓된 의혹”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며 더 거세게 항의했습니다. 그러나 주 법원은 끝내 나발니에게 유죄판결을 내렸고, 징역형을 받은 그는 2018년 대선 출마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나발니는 독극물 테러로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있습니다. 2017년 시베리아 시위 현장에선 푸틴 지지 세력의 녹색 염료 공격으로 한쪽 눈 시력을 80%가량 잃었고, 2019년에는 구금 중 구치소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알레르기성 발작을 일으켜 입원했습니다. 당시 나발니의 주치의는 그가 “불상의 독성 화학물질에 노출됐다”고 진찰했습니다.
 

2017년 4월 시베리아 시위현장에서 녹색 염료 공격 받은 나발리를 그의 아내가 치료하고 있다. 나발리는 이 사건으로 한쪽 눈의 시력을 80%가량 잃었다. [AP=연합뉴스]

 
나발니의 가족과 지지세력도 탄압을 당했습니다. 나발니의 동생 올레크는 회삿돈 횡령 혐의로 수감됐고, 나발니 지지자들은 계좌가 동결돼 수억 원대 빚쟁이로 몰렸습니다. 러시아와 해외 언론은 푸틴 정권이 야권 인사들에게 돈세탁 혐의를 뒤집어씌우는 신종 금융 탄압을 하고 있다며 푸틴을 비난했는데요. 월스트리트 저널(WSJ)은 “러시아 정부가 야권 인사의 심리적 저항선을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탄압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눈에는 눈, 고소엔 고소  

반복되는 투옥과 살해 위협에도 나발니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되려 푸틴정권의 비리를 추적하는 반부패재단 FBK를 설립하고, 고소·고발로 몰아붙였죠.  
 
2015년에는 지위를 이용해 두 아들의 재산 축적을 주도한 의혹으로 유리카 차이카 전 검찰총장을 고발했고, 2016년에는 사위 키릴 샤말로프의 사업에 국부펀드 자금 지원을 지시했다며 푸틴을 반부패법 위반 혐의로 고소했습니다.  
 

2017년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된 나발리가 재판을 앞두고 여유롭게 V자를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2017년에는 푸틴의 후계자로 불리던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당시 총리의 부정 축재를 폭로했습니다. 유튜브에 올린 폭로 영상은 3500만 조회 수를 기록하며 폭발적인 관심을 얻었고, 모스크바 등 주요 도시에서 수만 명이 참가한 반정부 시위가 열렸습니다. 결국 메드베데프는 지지율에 타격을 입고 올해 초 사퇴했습니다.  
 

인터넷 막으면 발로 뛴다

나발니의 주 무대는 역시 온라인입니다.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 각종 SNS에 시위 장소와 일정을 올리면 사람들이 모이는 식으로 집결했죠. 러시아 정부가 위기를 느낀 걸까요. 지난해 러시아 정부는 구글에 나발니의 유튜브 영상 확산을 막아달라고 요청하는 등 인터넷 통제를 강화했습니다.
 
하지만 나발니에게는 또 다른 무기가 있습니다. 바로 지지자들인데요. 그는 직접 발로 뛰며 지지자를 모으기로 유명합니다. 어떤 위기에도 위트있고 과감하게 받아치는 특유의 여유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비결입니다.
 

지난 22일 러시아에서 열린 반정부 시위에서 한 남성이 나발리 사진을 들고 있다. 시위대는 나발니가 누군가에게 독극물 테러를 당했다며 "나발리는 살아야 한다"는 구호를 외쳤다. [AP=연합뉴스]

 
나발니는 최근까지도 통합러시아당 의원들의 비리 자료를 수집하러 다녔다고 합니다. 의식을 잃은 20일에도 반정부 운동을 준비했다고 하는데요. 현재 시아 정부는 크렘린 궁과 나발니의 독극물 중독설은 관련이 없다고 반발하고 있지만, 나발니가 깨어나기 전까지 그 의혹을 벗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 [후후월드]는 세계적 이슈가 되는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을 파헤쳐 보는 중앙일보 국제외교안보팀의 온라인 연재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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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정 기자 lee.minjung2@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