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중국 문인 오찬은 어떤가. 그도 ‘세한도’에 흠뻑 빠진 것 같다. ‘혹독한 서리와 눈을 만나도, 하늘과 땅의 바른 정기로 우뚝하다. 변하지 않는 절의를 배우고 익혀, 현인을 본받고 성인을 본받는다’라고 썼다. 추사의 그림 한 폭은 중국 학자들에게 이토록 큰 영향을 미쳤다. 장요손의 촌평도 절창이다. ‘중국과 조선에 새로운 우정 맺어지고, 백 리 먼 발걸음에 현자들이 모였네.(중략) 한 폭의 그림에 영원의 뜻 담겨, 시들지 않는 절의가 온 누리에 빛나네.’
사계절 푸른 추사의 걸작
돌고 돌아 국민의 품으로
19세기 한·중 교류 결정판
그 기품을 누가 이어갈까
‘세한도’는 두 말이 필요 없는 추사의 명작이다. 값을 매길 수 없는 ‘무가지보(無價之寶)’로 꼽힌다. 소장자 손창근(91)씨가 지난주 국립중앙박물관에 아무 조건 없이 기증했다. 코로나19로 우울한 우리 사회에 즐거운 소식을 안겼다. 개성 출신의 사업가인 선친 손세기(1903~83)씨에 이은 2대째 문화재 기증으로 화제가 됐다. 지도층의 사회적 책임을 뜻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이 됐다.
추사 만년의 농익은 붓놀림이 담긴 그림도 그림이지만 ‘세한도’의 또 다른 진가는 그림 뒤에 붙은 중국과 조선 학인들의 시문(詩文)이다. 이상적은 중국 연경(燕京·현재 베이징)에 가는 길에 스승의 그림을 중국 학자들에게 보여주었고, 이에 중국 문인 16명이 앞다투어 추사와 제자의 ‘후조’를 예찬하는 글을 지었다. 200년 전 국경을 뛰어넘는 양국 문인들의 학문 공동체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됐다. 덕분에 ‘세한도’는 길이 15m의 두루마리 대작으로 완성됐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세한도’는 미완성이다. 현재진행형이다. 정인보의 글 뒤에 빈 공간이 꽤 많이 남아 있다. 추사와 이상적은 지금 그 여백을 채울 21세기의 후예들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3막의 불씨는 일단 손세기·손창근 부자가 지폈다. 거상(巨商) 손세기는 손재형을 거쳐 또 다른 개성 상인에게 넘어간 ‘세한도’를 1960년 4·19 무렵 사들였고, 그 아들 손창근이 60년 만에 국민의 품 안으로 돌려보냈다. 파란만장한, 이른바 팔자가 드센 ‘세한도’가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됐다.
살아생전 손세기에 관한 일화가 있다. ‘세한도’의 신기한 기운에 반해 “그림만 봐도 잠이 잘 오고 화가 풀렸다”고 한다. 자잘한 명리를 초월한 예술의 놀라운 치유력이다. 하루하루가 혼탁하고, 인심이 수시로 변하는 시대이지만 ‘세한도’에 담긴 후조는 결코 시들지 않을 것이다. 그런 푸른 세상을 만들어가는 건 우리에게 남은 몫이겠지만….
박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