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교 연세대로 돌아본 윤동주
여기서 청년은 윤동주(1917~45) 시인이다. 1938년 봄 연희전문에 입학한 그가 첫 방학을 맞은 심정은 어땠을까. 책꽂이에 있는 『우리말본』이 들어온다. 국어학자 외솔 최현배(1894∼1970) 선생이 한국어 문법을 집대성해 1937년 펴낸 책이다. 윤동주는 최 교수로부터 제대로 된 한국어를 공부했다. 아름다운 우리말에 눈을 떴고, 시어를 다듬고 다듬었다. 일제의 조선어 폐지 정책에 따라 최 교수에게 한 학기밖에 배우지 못했지만 말이다.
옛 기숙사 건물 전체 기념관으로
한국어 익히며 시인의 꿈 이룬 곳
친필 원고 등 국내외 자료 총망라
일제강점기 청춘들 흔적 살려내
100년 시간 담은 근대문화재로 등록
옛 연희전문 기숙사 건물 전체가 윤동주기념관(이하 기념관)으로 새로 태어났다. 1922년 건립된 핀슨관이다. 100년 전 건축비를 지원한 미국 남감리교회 핀슨 박사에서 이름을 따왔다. 그간 음대, 대학신문, 법인사무처 건물로 사용하다가 2년 전부터 기념관 개관을 본격 준비해왔다. 2013년 윤동주 유족들이 시인의 육필 원고 및 유물 전체를 대학 측에 기증하며 기념관 조성이 구체화했고, 연대 75학번 동문 박은관 시몬느 회장의 후원으로 열매를 맺게 됐다.
기념관은 총 3층, 연면적 740㎡(약 224평) 규모다. 1층 전시장, 2층 도서관, 3층 공연장으로 꾸며졌다. 윤동주 개인을 넘어 그와 교류한 친구, 그를 연구한 국내외 문인·학자 등을 연결하며 윤동주가 우리 사회에서 차지해온 면모를 다각적으로 살폈다. 김성연 기념관 총괄기획실장은 “단순한 복원, 재현이 아닌 끝없는 해석의 공간으로 구성했다. 이곳을 거쳐 간 사람들의 흔적을 주목해달라”고 말했다. 설계는 연세대 건축과 성주은·염상훈 교수가 맡았다. 성 교수는 “옛 모습을 최대한 간직하되 그간 칠하고 또 덧칠해온 건물 내부 페인트를 얼룩덜룩하게 갈아내 100년 세월의 층위를 드러냈다”고 설명했다.
일례로 네 번째 방 ‘새로운 길’을 보자. 38학번 새내기 윤동주가 조선의 말과 역사를 익히고, 당대 세계 문화를 흡수하는 과정을 돌아본다. ‘새로운 길’은 주로 동시를 써온 윤동주가 대학에 들어와 처음으로 쓴 시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고개를 넘어서 마을로/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나의 길 새로운 길.’ 앞날에 대한 풋풋한 기대다. 반면 그가 4학년 때 쓴 ‘길’은 ‘잃어버렸습니다’로 시작한다.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라고 끝냈다. 사방이 꽉 막힌 현실에 대한 처절한 깨달음이다. 숱한 고통 끝에 얻은 그의 각성은 이후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서시’)에서 한층 굳건해진다.
윤동주는 27년 2개월이란 짧은 생을 살았다. 그중 연희전문 4년이 가장 뜨거웠다. 시인 윤동주의 피가 돌고 뼈가 여물었다. 시 19편을 모은 대학 졸업기념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내려했으나 험악한 정세를 염려한 주변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 시집 3부를 작성했는데, 그중 후배 정병욱에게 준 한 부가 살아 남아 오늘날 우리가 그의 문학을 누릴 수 있게 됐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원래 제목은 『병원』이었다고 한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늙은 의사는)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병원’) 병든 사회를 치유하겠다는 선언처럼 들린다.
코로나19 재난으로 연말께 문 열어
지난 10년간 준비해온 기념관도 코로나19로 문을 열지 못하고 있다. 윤동주 생일인 12월 30일에 맞춰 일반 개방할 예정이다. 윤동주가 일본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쉽게 쓰여진 시’의 마지막 대목을 옮겨본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윤동주 조카인 유족 대표 윤인석 교수(성균관대 건축과)는 “큰아버지 성품에 기념관 건립을 계면쩍어 하실 것 같다”며 “윤동주란 박제화된 인물 대신 집을 떠난 전국 각 지역 청춘의 일상이 깃든 곳인 만큼 건물 이름도 연희문학(문화)관으로 거듭나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기숙사 3층 천장 목재에 찍힌 ‘신의주’
3층 동쪽 도머창(지붕 경사면 위로 튀어나온 창) 밖으로 1968년 세운 윤동주의 ‘서시’ 시비가 들어온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던’ 청년 시인의 간절한 마음을 돌이켜본다. 남쪽 창가엔 1인용 의자가 있다. 무릎을 꿇고 창밖을 내다볼 수 있다. 윤동주의 ‘참회록’ 한 구절이 떠오른다.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는 다짐이다.
3층 공간은 우리가 평소 잊고 사는 자신과 대면하는 곳이다. 공연장·강연장으로도 쓰일 예정이다. 김현철 윤동주기념사업회 운영위원장은 “커피숍을 들이자는 제안도 있었지만 빈 공간으로 남겨두기로 했다”며 “사람과 사람이 만나며 새로운 길을 계속 만들어갔으면 한다”고 말했다.
박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