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카만 암전 화면. 젊은 남자가 초로의 여자 환자에게 추근대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인적 드문 시각의 병원 물리치료실, 간호조무사인 남자는 불편한 듯 상황을 벗어나려는 환자의 의연한 대꾸에도 추파를 멈추지 않는다. 긴장된 공기 속에 갑자기 불안한 침묵이 엄습한다.
임선애 감독의 장편 영화 데뷔작
‘화차’ ‘남한산성’ ‘사바하’ 등 상업영화 스토리보드 작가로 일해온 임 감독은 2013년 우연히 여성 노인 대상 범죄 관련 칼럼을 읽고 이 영화를 시작했다. 여러 실제 사건이 토대였다.
17일 중앙일보에서 만난 임 감독의 말이다. 그는 “사별하거나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여성 노인은 더 쉽게 타깃이 되더라”며 “우리 사회가 ‘노인’과 ‘여성’을 분리하고 그들을 무성적인 존재로 보는 편견 때문에 피해자들은 신고할 용기조차 못 냈다. 가해자들이 바로 그 점을 악용해 타깃으로 삼는다는 데 경악했다”고 했다.
하필 69세로 정한 건 “중년과 노년의 경계선의 나이”여서다. “예전엔 할머니라고 생각했는데 60대가 된 어머니를 보니 중년 같았고 나이에 대한 선입견으로 구분 지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면서다.
그는 “아직 노인 여성의 (성폭행) 피해 사례를 이야기한 영화가 외국에도 없었다”며 “누군가 한 번이라도 더 관심 갖고 들여다볼 계기가 되고, 피해자들이 (영화를 통해) 용기를 낼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효정은 강단 있는 캐릭터다. 의지할 가족 없이 간병일을 하며 살지만, 남들에게 무시 안 당하려 옷을 차려입고 수영으로 몸을 단련하고 정갈한 자세를 유지한다. 사회가 정해놓은 ‘노인다운’ 틀에서 벗어나 있을뿐더러, ‘피해자다움’에서도 비켜나 있다. 수치심에 절망하기보단 경찰의 비웃음 섞인 추궁에 담담히 증거를 내밀고 잘못된 건 당당히 꼬집는다. 성폭행 사건을 안 누군가가 “조심 좀 하시지” 하자 “뭘 어떻게 조심해요” 일갈한다.
효정의 유일한 조력자론 동거 중인 동갑내기 시인 동인(기주봉)이 있다. “노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면 관객들이 외면한다며 변호사나 활동가 등 젊은 조력자를 만들라는 말을 들었지만, 중요한 건 효정의 변화였고 효정과 동인이 무력감을 느끼면서도 그들(노인) 스스로 명예를 지키기 위해 나아간다는 점이었다.” 임 감독이 사전 인터뷰에서 들려준 얘기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