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인해 묻혀버렸지만, 올해는 새마을운동 50주년이 되는 해로서 그 의미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구한말 개화파 운동의 실패와 전통 사회의 붕괴 이후 한국은 식민지를 통해 근대화(‘식민지적 근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후 한국인 스스로에 의해 본격적으로 추진된 최초의 근대화 프로젝트는 박정희 대통령의 ‘조국 근대화’였다. 조국 근대화는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희생하면서 오로지 물질적 측면에서만 근대화, 즉 산업화를 추진한 것이었다. 이것이 부정할 수 없는 한국적 근대화의 길이었다.
품격없는 한국 도시들
천박한 근대화의 산물
올해, 새마을운동 50년
성찰적 근대화 요구돼
문제는 초가지붕을 없앤 것이 아니라 대안적인 디자인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초가지붕에서 슬레이트 지붕으로의 교체는 오로지 정치적으로 결정된 것이지, 거기에 무슨 미적이거나 문화적인 고려 같은 것이 없었다. 당시 미국 유학에서 갓 돌아와 우연한 기회에 박 대통령에게 슬레이트라는 신재료를 소개한 건축가 조자용은 자신이 본의 아니게 ‘전통의 대학살’에 가담한 것에 평생 죄책감을 느끼며 살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슬레이트라는 재료에는 죄가 없다. 콘크리트와 플라스틱 자체에 죄가 없듯이 말이다. 오로지 그러한 재료에 어떤 형태를 부여하고 활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을 뿐이다. 새마을운동을 긍정하는 측과 비판하는 측 모두에게 정확히 빠져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문화적 관점’이다. ‘전통의 대학살’보다도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내지 못한 문화적 무능력을 더 통탄했어야 한다.
한국의 근대화는 물질적·도구적 근대화였고 거기에는 어떠한 미적·문화적 근대성도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한국의 근대화는 ‘천박한’ 근대화가 맞다. 오로지 ‘조국의 발전’과 ‘민족의 번영’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 거기에는 서구의 모던 디자인(Modern Design)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문화적 프로그램이 없었다.
한국의 ‘천박한 도시’가 ‘천박한 근대화’의 산물이라면 이제 그것을 넘어서는 품격 있는 근대화는 어떻게 가능할까. 이 대표의 ‘천박한 도시’ 발언은 마침내 세종시로의 천도 주장과 연결되고 개헌을 해야 하네 마네 하는 논란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것들이 전부 정치적인 차원에서만 논의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천도’라는 말이 ‘천박한 도시’의 새로운 줄임말일 뿐이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지우기 어렵다. 천박한 근대화를 극복하는 길은 지금이라도 지체된 정치·사회·문화적 근대화 프로그램을 추진하는 것이다. 새마을운동 50주년이 되는 올해야말로 진정한 한국적 의미에서의 ‘성찰적 근대성’이 요구되는 시점이 아닐까 한다.
최범 디자인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