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마음 읽기

[마음 읽기] 공존의 숲

중앙일보

입력 2020.08.12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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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시인

“나는 설악산으로 찾아온 손님에게 경치를 설명하지 않는다. 말(有言)이나 침묵(無言)으로 설명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저 같이 산중을 걸으며 푸른 뫼 뿌리를 같이 보고, 백담계곡의 물소리를 같이 듣고, 같이 솔향기도 맡고, 옹달샘 물을 같이 마셔 보고,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바람을 직접 느낀다. 달이 뜨면 달을 보고, 별이 뜨면 별도 본다. 다음 날 아침에는 상쾌한 산중 공기도 마시고 다시 산 위로 흘러가는 구름도 쳐다본다. 그러다 보면 손님은 ‘아, 설악산은 정말 좋습니다’ 하고 감탄한다.”
 
이 문장은 조오현 스님이 쓰신 것이다. 최근에 만해축전이 열리고 있는 만해마을을 다녀왔는데, 비 내리는 길을 혼자 걸었다. 혼자 걸으니 절로 유구무언이었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져 우산 속에 들어가도 옷과 신발이 축축하게 젖고 말았다. 그러나 골 안개 속에 들어앉은 푸른 산봉우리를 보거나 큰 바위를 치면서 쏜살같이 내려가는 물줄기를 바라보거나 활발한 구름을 올려보거나 여물고 있는 옥수수밭을 볼 때는 근심이 없었다. 그저 경치를 설명하지 않고 묵묵히 볼 뿐이었다. 그리고 내가 이 활동하는 생명 세계의 여름이라는 계절 속에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생명과 공존 강조한 만해 사상
‘남의 곤란은 나의 곤란’ 일깨워
수해 피해 함께하는 마음 나눠야

만해축전은 우리 근·현대사의 대표적인 독립 운동가이자 시인·불교사상가인 만해 한용운의 사상과 문학정신을 기리고자 해마다 치러지고 있다. 22회째를 맞은 올해 만해축전의 주제는 ‘생명과 공존’이었다. 그러고 보면 길고 요란한 장마의 한가운데 있는 이 세계가 하나의 살림 공동체로 여겨지기도 하는 것이었다. 특히 생명 활동이 어느 때보다 왕성한 이 여름은 그것을 더욱 공감하게 했다.
 
만해축전에 대해 누구보다 관심과 열의가 많았던 조오현 스님은 시 ‘산창을 열면’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화엄경 펼쳐놓고 산창을 열면/ 이름 모를 온갖 새들 이미 다 읽었다고/ 이 나무 저 나무 사이로 포롱포롱 날고…… // 풀잎은 풀잎으로 풀벌레는 풀벌레로/ 크고 작은 푸나무들 크고 작은 산들 짐승들/ 하늘 땅 이 모든 것들 이 모든 생명들이…… // 하나로 어우러지고 하나로 어우러져/ 몸을 다 드러내고 나타내 다 보이며/ 저마다 머금은 빛을 서로 비춰주나니……”
 
이 시를 통해 조오현 스님은 자연과 인간이 둘이 아니며 동일한 생명 가치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산창(山窓)은 산에 있는 집의 작은 창이지만 마음의 창이기도 하다. 스님은 이 산창을 통해 자연 세계와 우주를 본다. 그곳에는 일체의 존재들이 있다. 새들과 나무들과 풀잎과 풀벌레와 들짐승과 산짐승들이 살고 있다. 살고 있되 함께 어울려 살고 있다. 더불어 살면서 본래 스스로 갖고 있는 생명의 빛으로 서로를 더 환하게 비춰준다. 차별이 없는 동등한 존재들이 서로를 존중하면서 화엄의 세계를 이루는 멋진 광경을 표현한 수작이라고 하겠다.


조오현 스님의 선시조가 보여주는 생명 존중과 공존의 가치는 앞선 시대를 살았던 스님들의 시편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고려 말기 선승이었던 진각혜심 스님은 ‘어부사’에서 이렇게 썼다.
 
“조각배 한 척에 낚싯대 하나/ 도롱이에 피리 하나, 이 밖에 아무것도 없네/ 낚싯줄 드리워도 바늘은 굽히지 않거니/ 어떻게 물고기를 낚아 올리겠는가/ 죽음을 모르는 물고기들 서로 엉겨 사는 것 보네”
 
낚싯줄을 드리웠지만 낚싯바늘의 끝을 굽히지 않아 물고기를 잡아 올릴 생각이 없으니, 물고기들은 죽음을 잊고 즐거움으로 서로 어울려 살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서경』에서 유래된 ‘호생지덕(好生之德’을 이르고 있는 셈이다. 차마 생명을 죽이지 못하는 그 자비의 마음을 드러낸 것이니, 진각혜심 스님은 나와 다른 생명이 둘이 아님을 이 선시를 통해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시 ‘산창을 열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하나의 큰 숲이다. 곧고 굽은 나무와 수풀과 아름다운 울음을 우는 산새와 이동하는 바람과 견고한 대지가 만든 거대한 숲이다. 이 세상은 희로애락이 있는 각각의, 여럿의 사람들이 모여 한판을 이룬 인생 공동체다. 너와 나의 차별은 없고, 우세와 열세도 없다. 오로지 대등하며 서로 얽혀 살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위해서는 의논과 절충이 필요하다. 누군가의 곤란한 형편은 나의 곤란한 형편이며, 누군가의 낙락(樂樂)한 일은 나의 낙락한 일이다. 우리가 하나의 공존의 숲에 살고 있으므로, 가령 지금 당장에 우리가 처해 있는 이 수해의 어려움을 함께 넘어서는 일에도 마음을 나누어야 함은 물론이다. 누군가를 돕는 일은 나를 돕는 일이 되는 까닭이다.
 
문태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