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청년이 1년 5개월간 교제한 연인과 결혼 준비를 밟아가던 중 여성의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게 됐습니다. 할아버지는 남성에게 본관을 물었고, 경주 김씨라는 대답을 듣자 버럭 화를 내면서 ‘우리는 서경 정씨라서 혼인할 수 없다’고 폭탄 선언을 합니다.
두 사람에게 생각지도 못했던 장애물이 나타난 것은 고려 때 벌어진 사건 때문입니다. 서경천도운동, 묘청의 난을 두고 다툰 김부식과 정지상의 갈등이 대대로 전해지면서 이들의 결혼을 막은 것이죠.
파평 윤씨 VS 청송 심씨, 갈등의 시작은 묘자리 싸움
[픽댓]히스토리
유서 깊은 두 집안의 갈등은 400년 전 묘자리에서 시작됐습니다. 1614년 영의정 심지원이 고려 시대 윤관 장군의 묘 근처에 부친의 묘를 만들고 주변을 집안 묘역으로 조성한 것이 문제가 됐습니다. 윤관 장군이 죽고 500년이 지난 이 때는 묘비가 사라지고 무덤도 분간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뒤늦게 윤관의 후손들이 조상 묘자리를 찾겠다며 심지원 부친의 묘 주변을 파헤쳤고, 이를 본 청송 심씨 측이 반발하면서 400년이 넘는 싸움이 시작됩니다.
사실 두 집안은 모두 조선시대에 왕비를 3~4명씩 배출한 명문가이고, 혈연으로 엮인 유력 가문도 많았습니다. 국왕조차 입장을 내기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영조도 중재에 나섰다가 실패했고, 파평 윤씨 측 인사가 영조의 중재를 거부했다가 태형으로 사망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2006년 파평 윤씨 측이 인근 토지를 구입해 청송 심씨에 기증하고, 청송 심씨는 심지원의 묘를 기증받은 지역에 옮기는 것으로 두 집안의 다툼이 마무리됐습니다.
왕후 자리 때문에… 청송 심씨와 여흥 민씨
심온이 태종이 상왕으로 물러나고도 병권을 내놓지 않는다는 것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벌어진 이 사건은 훗날 박은의 무고로 밝혀졌습니다. 이런 갈등 때문에 심온은 “앞으로 박은 집안과는 혼사를 맺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이야기가 심씨 집안에서 전해진다고 합니다. 다만 현재 학계에선 이 사건의 배후가 태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강력한 왕권을 위해선 외척 세력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태종은 자신의 처가인 여흥 민씨 집안을 도륙했던 전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반남 박씨(16만1000명)는 밀양 박씨(310만4000명)에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소수인데 유명 인사가 많기로 유명합니다. 조선 후기엔 북학파 박지원, 개화파 박규슈·박영효 등 개혁지향적 지식인들을 배출했는데 대한민국이 건국된 후엔 소설가 박완서, 영화감독 박찬욱, 배우 박신양·박보검 등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숙종 때 왕비 자리는 당시 치열했던 남인과 서인 간의 당파 싸움과 맞물려 주인이 몇 차례 바뀌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인현왕후는 희빈 장씨에게 자리를 뺏겼다가 되찾는 일이 있었죠. 이로 인해 민씨 집안도 장씨 집안과 원수가 됐습니다. 지금도 일부 여흥 민씨 집안에선 ‘(배우자로) 인동 장씨는 절대 안 된다’는 말을 듣는다고 합니다.
한편 청송 심씨와 묘자리를 다툰 파평 윤씨는 은진 송씨와 갈등이 있었습니다. 두 집안은 모두 당대 기호지역(충청)을 대표하는 학자 집안이었는데, 윤증이 아버지 윤선거의 묘지명을 송시열에게 부탁하면서 문제가 시작됐습니다. 송시열은 윤선거의 친구이자 윤증의 스승이었으니, 자연스러운 부탁이었죠. 그런데 윤증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발목을 잡았습니다.
윤선거는 과거 송시열과 다투던 남인 윤휴를 두둔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에 대해 앙금을 품고 있었던 송시열은 윤선거의 묘지명에 병자호란 당시의 행적을 비난하는 내용을 남겼습니다. 묘지명은 대개 고인에 대한 찬사로 채워진다는 것을 고려하면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윤증은 펄쩍 뛰었고, 송시열은 다시 써달라는 부탁을 거절했습니다. 이때부터 두 집안은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됐습니다.
1908년에는 충청지역 유지들이 모여 '세혐 때문에 이웃 간에도 교류하지 않는 것이 큰 병폐'라면서 지역의 단결을 위해 송시열의 후손과 윤증의 후손이 결혼할 것을 제안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직장에서 원수 집안사람 만나면 사표 제출
숙종 때 이조참판에 제수된 조태채는 세혐 관계였던 이조판서 김구 밑에서 일하게 되자 수 차례 사표를 썼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행정안전부 차관이 장관의 집안이랑 사이가 안 좋아 사표를 낸 셈이죠. 두 집안이 세혐 관계가 된 것은 50년 전 김구의 부친 김징이 조태채의 조부를 탄핵했기 때문입니다.
숙종의 만류에도 조태채가 뜻을 굽히지 않자 숙종은 "세혐이라는 것이 끝끝내 너무 지나치다"라며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런 예가 많이 등장합니다. 이때문에 국왕은 때로는 꾸짖고, 때로는『삼국지연의』에서 오나라 무장이었던 능통과 감녕의 고사를 인용하면서 달래기도 했지만 큰 효과는 거두지 못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세혐 관계였던 채동술과 홍은모를 불러 자녀를 결혼시키라고 요구했지만 두 집안은 끝내 사돈을 맺지 않는 일도 있었습니다. 또 세혐 집안의 인사가 감독관으로 참석했는데도, 시험장에서 나오지 않고 답안지를 제출했다는 이유로 이를 비난하는 상소가 빗발치기도 했습니다. .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신분제가 사라지고 족보와 가문이 덜 중요해지긴 했는데 그렇다고 힘이 없는 건 아닙니다.
얼마 전 황희석 열린민주당 최고위원이 페이스북에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남명 조식 선생의 직계후손이라고 주장했다가 남명 조식의 진짜 후손 측에서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반박한 일이 있었죠. 황 최고위원은 그 전에도 조국 전 장관을 조광조에 비유했다가 한양 조씨 대종회에서 “한양 조씨 문중을 모독하지 말라”며 사과를 요구받기도 했습니다.
비록 과거에 세혐 같은 부정적 유산도 있었지만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주는 긍정적 요인을 전혀 무시할 수만은 없습니다. 또 최근에는 새로운 명문가의 기준을 만들려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3대가 병역의 의무를 이수한 병역명문가 등이 대표적입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세우고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이 있었는데, 왕조가 아닌 민주공화정에 맞는 명문가의 기준이 더욱 인정받을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기를 기대해봅니다.
유성운·김태호 기자 pirat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