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0만 달러의 출발은 남북 관계 성수기였던 2006년이다. 당시 남북 간에 다양한 경제협력과 사회교류 사업이 진행됐는데 그중 하나였다. 남은 북으로 섬유·신발·비누 등을 만들 원자재 8000만 달러어치를 올려보내고 북은 남에게 광물 자원으로 되갚는다는 남북 합의였다. 당시 사정에 정통한 인사는 “당초 북한은 경공업 원자재를 무상으로 달라고 요구했지만 통일부 일부 관료가 무상 지원에 반대했다”며 “그래서 ‘남이 줄 것’과 ‘북이 줄 것’을 확인해서 교환하는 차관 형식이 됐다”고 말했다. 남북은 경공업 차관의 첫 상환금을 놓고도 줄다리기를 했다.
북에 보낸 경공업 원자재 차관
광물 자원으로 상환 이행 거부
역대급 북한 철도 현대화 앞서
8000만 달러 대책 마련이 순서
현 정부가 내건 대표적 대북 사업 중 하나가 남북 철도·도로 연결과 현대화다. 김대중 정부 때부터 검토·추진됐던 구상이다. 그런데 이번엔 사업 규모가 역대급이다. 남북이 합의한 조사 대상인 개성-신의주(400㎞), 금강산-두만강(800㎞)의 북한 철도 구간이 1200㎞에 달한다. 이는 경부선 철도 길이(440여㎞)의 3배가량이다. 익명을 요구한 남북 교통·물류 전문가는 “1200㎞나 되는 엄청난 구간인데 침목을 교체하는 정도인지, 고속철도를 만들자는 건지 남북 간에 정해진 것도 없고 어느 정도로 할지에 대한 국민적 합의도 없다”고 지적했다. 2018년 남북 공동조사 결과 북한 철도는 일부 구간에선 시속 15㎞(개성-사리원)에 불과할 정도로 열악했다. 이는 42.195㎞를 2시간가량 안에 주파하는 마라톤 우승자보다 느린 속도다.
또 엄청난 예산을 들여 어렵사리 남북 철도·도로를 연결하고 현대화한다 한들 미국과 국제사회의 대북제재가 계속되는 한 빈 철도, 빈 도로가 되기에 십상이다. 또 다른 경우의 수도 있다. 북한 자원에 정통한 다른 전문가는 “남북 철도를 연결해 북한 철도까지 보수했는데 대외 상황이나 남북 관계 악화로 북한이 철도를 닫아버리면 중국 좋은 일만 해주는 꼴이 된다”고 경고했다. 남한 돈으로 북한 철도를 고쳐놨는데 결과적으론 남은 소외되고 북·중 철도 물류의 확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인영 신임 통일장관은 지난달 31일 강원도를 찾아 남북 철도·도로 연결 추진을 재확인했다. 그런데 8000만 달러회수를 포함한 제반 대책은 있는지 궁금하다. 철도·도로 연결과 현대화를 본격 추진하려면 8000만 달러 차관 얘기가 재등장할 수밖에 없다. 그간 4%의 연체이자까지 합치면 8600만 달러다. 참고로 북한이 남에서 받은 뒤 갚지 않고 있는 차관에는 경공업 원자재 차관만 아니라 식량 차관(7억 2004만 달러)도 있다.
채병건 정치외교안보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