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만 보는 게 아녜요. 손끝으로 만지고 상상하는 것을 통해 사물이나 세상을 바라볼 수도 있어요.” 이런 생각으로 그는 1996년 비영리 사단법인 ‘우리들의 눈’을 만들었다. 시각장애인에게는 미술이 필요 없을 것이라는 편견을 깨고, 미술교육을 통해 시각장애인들이 유연하고 창의적인 발상을 하도록 이끄는 단체다. 지난 23일 서울 인사동에서 엄 작가를 만났다.
사단법인 ‘우리들의 눈’ 엄정순 작가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 등 진행
5년 전부터 미대 입학사례 늘어
엄 작가는 ‘시각장애자에겐 암흑만이 있고, 그들에게 미술은 필요 없다’는 편견과 싸웠다. “본다는 건 이해의 수단이잖아요. 그런 점에선 누구에게나 세상을 보고 이해할 수 있는 눈이 있어요. 조금 다르고 약할 뿐이죠. 누구에게나 있는 그 가능성을 개발하고 확인시켜 주고 싶었어요.”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옛말이 있잖아요. 딱 자기가 만진 부분만 알고 이를 고집한다는 경구인데, 이 말도 편견이죠. 아이들과 함께 해보면 보이는 것을 넘어서 엄청난 상상력을 발휘하는 걸 봐요. 수백권의 책을 읽어도 자신이 직접 체험한 만큼 강렬할까요. 시각장애인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건 도움이 아니라 직접 느끼고 경험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엄 작가는 “두려워서 코끼리를 만지지 못하고 종일 울기만 하는 아이도 친구들과 함께 극복하고 그 느낌을 표현할 수 있게 됐다”면서 “저도 아이들을 통해 타인과 세상에 대한 이해력이 커졌다”고 전했다.
엄 작가의 이런 노력 끝에 ‘미대 진학 프로젝트’가 추가됐고, 2015년 박찬별 씨를 시작으로 시각장애 청소년들이 미대에 입학한 사례가 늘었다. 그는 체계적인 교재를 만들고, 이를 지도할 교사 양성 프로그램도 준비 중이다. “지금 세상은 모든 게 이미지 시대잖아요. 시각장애 청소년들이 미술교육을 받지 않으면 소외당할 수밖에 없어요. 이들이 더불어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유부혁 기자 yoo.boohyeo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