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미래가 위기에 처했어요. 남유럽 회원국들이 파산하면 우리도 결국 파산합니다.”
지난 21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의 유럽연합(EU) 정상회의장. 회의 안건인 7500억 유로(약 1032조) 경제회복기금을 놓고 27개 회원국 지도자들의 갑론을박이 오가던 중,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낮은 목소리로 했다는 말이다. 남유럽 국가들에게 ‘퍼주기’가 될 수 있다며 기금 조성에 반대하는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를 향한 발언이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전했다.
뤼터 총리는 메르켈 총리의 발언에 설득당했고, 나흘에 걸친 마라톤 회의는 끝났다. EU는 7500억 유로 기금을 승인했다. 상환할 필요가 없는 보조금 3900억 유로와 나중에 해당 회원국들이 상환해야 하는 대출금 3600억 유로로 구성됐다.
이탈리아는 820억 유로의 보조금과 1270억 유로의 대출금을 지원받게 돼 가장 큰 수혜국이 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직격탄을 맞은 이탈리아·스페인 등 남유럽 국가에는 반가운 마중물이다.
“전례 없는 규모의 기금 지원”(CNBC) “EU의 부흥을 위한 획기적 결정”(뉴욕타임스) “역사적인 움직임”(파이낸셜타임스) 등의 평가가 쏟아졌다. 가장 박한 평가를 한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도 “EU가 적어도 지금까지 이어온 갈등과 분열의 역사를 뒤로하고 협력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고 평했다.
메르켈 총리의 이번 행보는 처음엔 의외로 받아들여졌다. 메르켈은 수년간 회원국의 경제 위기 해결을 위한 EU 차원의 재정 지원에 신중한 입장을 고수해왔기 때문이다. 2015년 그리스 재정 위기 때도 “그리스의 부채 탕감을 EU가 해주는 건 불가능”이라고 버텼고 그리스의 연금ㆍ세제 개혁을 약속을 받아낸 뒤에야 구제금융을 승인했다.
그랬던 메르켈이 변했다. WSJ는 “(종교) 개종과 같은 변화”라고 평했다. 그를 바꾼 건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인한 위기의식이다.
협상은 지난 17일부터 이틀간 진행될 예정이었지만, 보조금 규모에 대한 이견이 이어지며 나흘로 늘어났다.
네덜란드의 뤼터 총리는 스웨덴ㆍ오스트리아ㆍ덴마크 등과 함께 보조금 규모 축소를 주장했다. 이 4개국은 보조금을 늘리면 도덕적 해이만 늘어난다며 반대해 ‘절약 4국(the Frugal Four)’라는 별칭도 얻었다. 기금을 반대하는 4개국이 유럽 북부에 위치했다는 이유로 기금 논란은 '남북 갈등'으로 비화하는 분위기였다.
이때 조용하지만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잡은 인물이 샤를 미셸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이다. 미셸 의장은 3500억 유로와 4000억 유로 사이의 금액인 보조금 3900억 유로라는 숫자를 타협안으로 제시했고, 양측에 대한 설득에 들어갔다.
보너스도 얹었다. 네덜란드 등 ‘절약 4개국’에겐 리베이트 조항을 제시했다. EU에 내는 재정 기여금의 일부를 돌려받을 수 있는 금액을 더 돌려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기금 지원을 받는 국가들이 지출 계획을 면밀하게 제출하고 EU의 통제를 받는다는 조건도 붙였다. 네덜란드 등 4개국도 실속을 챙기며 체면을 살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회의 후 활짝 웃은 메르켈 총리는 “EU가 사상 최악의 위기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했다”며 “통합국가로 가는 큰 이정표를 세운 날”이라고 평가했다. 마크롱 대통령 역시 “유럽이 새 역사를 썼다”고 자축했다. 미셸 의장은 “유럽이 행동하는 힘을 보여줬다”며 “앞으로 유럽이 코로나19를 극복해나가는 여정의 전환점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