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난다 소리쳐도 주먹 날아왔다" 일본판 최숙현 사건 폭로

중앙일보

입력 2020.07.22 05:00

수정 2020.07.22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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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코치가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모두가 있는 앞에서 내 뺨을 때렸다. 코피가 났다. ‘피가 난다’고 소리쳤지만, 폭행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코치의 주먹이 날아왔다”
 
일본 전직 야구선수 다이키(가명·23)가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과거 고교 야구 선수로 활동했다는 그는 일본 스포츠계에 만연한 폭력 문제는 오랜 관행이라고 폭로했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 보고서 폭로

일본 도쿄 올림픽 박물관에 설치된 올림픽 오성기.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는 20일(현지시간) '일본 내 아동청소년 운동선수 학대 실태' 보고서를 발표하고, 일본 스포츠계에서 일어난 폭행 문제를 폭로했다. [EPA=연합뉴스]

 
고(故) 최숙현 선수 사건으로 한국 스포츠계의 폭력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 가운데 일본에서도 운동선수를 상대로 한 지도자들의 신체·언어·성적 학대가 상당하다는 보고서가 나왔다. 2013년 한 차례 유도계 폭행 논란이 있었지만,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개선되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20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CNN에 따르면 HRW는 이날 '일본 내 아동·청소년 운동선수 학대 실태'라는 67쪽짜리 보고서를 발간했다. 지난 3~6월 50여개 종목 전·현직 선수 807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온라인 설문과 심층 인터뷰를 정리했다. 보고서의 부제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맞았다'였다.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 스포츠계 폭력은 주로 신체 학대에 집중됐다. 그중에서도 초·중·고교 선수 피해가 심각했다. 청소년기 운동선수로 활동했던 응답자들은 주로 주먹질, 뺨 맞기, 발길질, 물건으로 맞기 등의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음식과 물 섭취 제한, 머리카락 자르기 등 정신적 고통을 유발하는 폭력 사례도 상당했다.


운동선수 폭행 사례는 종목을 가리지 않았다. 야구도 예외가 아니다. 과거 고교 야구 선수로 활동했다는 20대 남성은 HRW와의 인터뷰에서 "팀 코치에게 맞은 날이 셀 수 없이 많았다"고 말했다. 사진은 지난 6월 도쿄 요코하마 구장에서 열린 무관중 야구 경기. 기사 내용과는 관계 없음. [AP=연합뉴스]

 
언어·성적 학대 정황도 드러났다. 응답자 18%가 언어폭력 경험이 있다고 답했는데, 훈련 중 '멍청이', '바보'라는 인신공격성 발언을 반복적으로 들었다고 답했다. 여자 선수의 경우 성폭행·성추행 괴롭힘을 고백했다. 주로 부상 치료를 빌미로 한 신체 접촉, 합숙소에서 강압에 의한 성폭행이 가장 많았다.
 

“다 너희를 위한 일”…폭력의 대물림

폭행 가해자는 지도자와 선배가 가장 많았다. 폭행은 지도자와 선수 사이뿐만 아니라 선후배 사이에서도 만연했다. 지도자는 선수 폭행 장면을 팀 전체가 지켜보게 했고, 선배가 코치의 폭행 방법을 그대로 답습했다. 군기를 잡겠다는 이유에서다. 
 
선수들은 폭행에 둔감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응답자들은 훈련 중 폭행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했다. 기록 향상을 위한 훈련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HRW는 지도자들의 위계에 의한 폭력이 선수들의 반항 의지를 묵살했다고 지적했다.
 
일본 아마추어 야구협회 소속으로 활동한 전직 야구 선수는 "코치는 폭력을 행사하며 '너희를 위해서'라고 말했다"며 "코치의 폭행은 선수를 향한 '애정'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코치의 위협이 정신적·육체적 상처로 남았지만 동시에 기록 향상을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군사주의 잔재가 만들어 낸 악습

HRW는 일본 스포츠계에 만연한 폭력을 일종의 '악습'으로 지칭했다. 그러면서 2차 세계대전 등 전쟁을 겪으며 형성된 군사주의 잔재를 배경으로 지목했다. 엄격한 규율을 '전통'으로 간주해 폭력과 학대를 정당화하고, '악습'으로 이어져 내려왔다는 것이다.
 

2013년 일본 여자 유도 국가대표팀 폭행 사건으로 사임한 소노다 류지 감독. [AP=연합뉴스]

 
실제 일본의 스포츠계 폭력 사건은 오랜 사회 문제다. 1980년 대 17살 여자 창던지기 선수의 사망 사건이 대표적이다. 코치로부터 상습 폭행을 받았던 이 선수는 "더는 못 맞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2013년에는 여자 유도계가 폭력 사태로 몸살을 앓았다. 여자 유도 국가대표 선수 15명이 감독과 코치진의 폭력 행위를 일본 올림픽위원회(JOC)에 고발하면서다. 선수들은 "감독 및 코치진이 올림픽 합숙 훈련 중 폭언과 폭행을 일삼아 잠 못 이룬 선수가 많다"고 호소했다. 결국 감독은 사임했다. 
 
이 사건으로 JOC가 내부 조사를 한 결과 일본 선수 중 10% 이상이 집단 괴롭힘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JOC는 폭력 근절을 위한 조치를 약속했다.  
 
그러나 2018년 체조 국가대표 선수 폭행 사건이 또 터졌다. 코치의 훈련 중 폭행에서 촉발한 사건이 일본 체조협회의 갑질 논란으로 번지며 일본 스포츠계의 권력형 폭력과 갑질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HRW "도쿄 올림픽을 변화의 계기로" 

HRW는 이번 보고서에서 일본 스포츠계 폭력 문제가 2013년 이후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내년 여름으로 예정된 도쿄올림픽을 변화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지난 3월 일본 도쿄 오다비아 공원에 설치된 올림픽 오륜기 조형물 앞에서 한 여성이 사진을 찍고 있다. [ 로이터=연합뉴스]

 
타쿠야 야마자키 스포츠 분야 전문 변호사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전직 선수나 기성 감독 등이 일본 체육계 주요 요직에 자리 잡고 있는 게 문제"라며 "폭행에 목소리를 내는 선수들을 격려하고, 제 식구 감싸기에 그치는 징계 문화를 바꿔야 폭행 관행이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도 HRW 보고서와 관련해 성명을 내고 "우리는 HRW 보고서 내용을 인지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괴롭힘과 학대는 사회의 단면으로 스포츠계도 예외가 아니다"면서 "IOC는 폭행과 학대가 '모든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는 올림픽의 가치에 어긋난다고 본다"고 입장을 밝혔다. 다만 JOC를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다.
 
한편 CNN에 따르면 JOC 측은 이번 보고서에 대한 공식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이민정 기자 lee.minjung2@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