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지금 하나씩 드러나는 실상은 놀랍다. 피해자 A씨는 “박 시장의 기쁨조 같은 역할을 강요당했고, 속옷까지 챙겨야 했다”며 비서 시절 4년간 성추행당한 구체적 경험을 폭로했다. 박 전 시장이 평소 약자와 여성 인권에 유달리 관심과 지지를 표명했기에 한국사회가 받은 충격은 크다.
시청 내부의 견제 시스템 무너져
진영 논리 떠나 진실 꼭 규명해야
페미니스트를 자처한 시장답게 서울시 조직도를 보면 이름도 생소한 젠더 특별보좌관, 젠더 정책팀, 젠더 자문관 등 조직은 외형적으로 요란하게 많이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정작 사건이 터지니 모두 다 무용지물이었다. 오히려 이런 문제를 예방하고 해결하라고 임명된 젠더 특보는 피해자가 아니라 박 전 시장을 먼저 챙긴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자신을 임명해준 시장에 대한 충성심과 개인적 인연 때문에 피해자 보호라는 공적 직무를 잊었던 것은 아닌가.
지금 국민이 알고 싶은 것은 사건의 진실이다. 한 여론조사에서 국민 60% 이상이 진상 조사가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가 난무하고, 온라인이 각종 억측과 논쟁으로 범벅되고 있는데 이는 건강한 사회의 모습이 아니다.
묵인과 방조 의심을 받으면서 조사 대상이 된 서울시청 공무원들이 조사 주체가 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재발 방지를 위해서라도 객관적인 제3의 기관이 공정하게 조사해 실체적 진실과 시시비비를 밝혀야 한다. 오죽하면 여성단체들이 서울시청의 조사에 의문을 제기하며 반발하고 있을까.
경찰이 ‘공소권 없음’으로 결론 낸다고 있는 죄가 없어지는 건 아니다. 철저한 진상조사를 위해서는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공약한 문재인 대통령이 이 사건에 대해 언급해야 한다.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성 접대 의혹 사건 때는 “공소기간이 지났지만,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진영 논리로 피해자를 이분화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번 사건에도 “진실을 밝히라”고 지시하는 것이 마땅하다. 사회적 약자와 여성 인권 보호에 있어서만큼은 여야는 물론이고 이념과 진영 차이도 빈부와 지위 차이도 없이 공평무사해야 한다.
일각에서 “맑은 분이라서” “도덕심이 강해서” “죽음으로 속죄했다”는 식의 발언은 성추행에 대한 일방적인 자기 편들기일 뿐이다. 미투(Me too) 운동을 부정하는 행태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권력자가 권력을 이용해 약자를 성적으로 억압하는지, 성폭력에 취약한 근무 환경은 없는지 철저히 점검해야 한다. 성폭력 예방 및 피해자 보호 업무 주관 부처인 여성가족부는 물론 지자체를 담당하는 행정안전부가 나서야 한다. 철저한 진상 조사와 함께 재발 방지 대책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이복실 전 여성가족부 차관·세계여성이사협회 한국지부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