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16일 진단한 영국과 중국의 관계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외교부 장관이던 2016년 “난 중국이 좋다(sinophile)”라고 했고, 그의 보수당은 “중국은 영국의 베스트 프렌드”라는 표현을 즐겨 썼다. 4년 흐른 현재, 양국 관계는 최악이다.
미국과 중국의 신(新) 냉전 속, 영국이 또 다른 전선으로 등장했다. 두 나라의 사이가 틀어진 건 화웨이 때문이다. 영국이 지난 14일(현지시간) 중국 화웨이 제품을 5세대(5G) 이동통신 네트워크 구축에 사용하겠다는 기존 결정을 번복한 직 후 두 나라의 갈등이 본격화하고 있다.
화춘잉(華春瑩)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15일 “영국의 결정에 강력히 반발한다”며 “모든 결정과 행위에는 대가가 따른다”고 으름장을 놨다. 주영 중국대사인 류사오밍(劉曉明)도 같은 날 한 공개 행사에 참석해 “영국이 화웨이를 버렸다”며 “중국은 앞으로 영국에 투자하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런던정경대(LSE) 중국연구소장인 스티브 창 교수는 가디언지와의 인터뷰에서 “지금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시진핑(習近平) 주석은 중국 국내에서 약한 리더십으로 비판받을 것”이라며 "중국의 반격이 거셀 것"이라고 전망했다.
중국이 실제로 투자를 중단하면 영국엔 뼈아픈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올 수 있다. 차이나 데일리 영국판의 2015년 집계에 따르면 중국이 영국의 인프라 등에 투자하기로 약속한 금액은 1050억 파운드(158조원)에 달한다. 2005~13년 이미 투자한 금액은 117억 파운드였다. 영국 최대 상하수도 업체인 테임즈 워터 지분의 10%도 중국 국부펀드인 중국투자공사(CIC)가 가지고 있다.
중국은 미국과의 신냉전에 대비해 영국을 대표적 헤징(위험 분산)의 대상으로 삼으며 투자를 집중해왔다. 때문에 화웨이 퇴출 결정은 중국의 대영 외교 기조를 뿌리부터 흔드는 충격이다. 미ㆍ중 사이 또 다른 샌드위치 신세인 한국에도 함의가 많은 대목이다.
“누구 편인가”를 계속 묻는 미국과 '통 큰 돈 줄'인 중국 사이에서 영국의 고민은 깊어갔다. 지난 1월엔 나름의 절충안을 찾았다. “화웨이에 5G 네트워크 장비 사업권을 주되 시장점유율 35%를 못 넘도록 하겠다”고 하면서다.
그러나 미국이 반발하면서 결국 신규 장비 계약을 금지하고, 이미 들어온 장비는 2027년까지 철수하라고 못 박았다. 이를 발표한 올리버 다우덴 디지털 담당 장관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고 말했다. 중국이 지난달 홍콩에 대한 사법통제권을 강화하는 국가안보법을 통과시키면서 영국 내 반중 정서가 커진 것 화웨이 퇴출 결정에 영향을 줬다.
화웨이에 대한 퇴출 결정은 영국의 외교정책의 주요 터닝포인트이기도 하다. FT는 “최근 몇 년 간 영ㆍ중 밀월이 가능했던 건 존슨 총리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식의 외교를 꿈꿨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단순히 미국의 동맹으로 보조 역할만 하는 대신,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 건설에 핵심적 역할을 했던 엘리자베스 1세처럼 팽창 외교 전략을 썼다는 의미다.
FT는 “문제는 이번 결정이 외교적 전략의 고민에서 나온 게 아니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무릎을 꿇은 결과라는 데 있다”이라며 “화웨이 퇴출 결정은 중국으로부터의 독립 선언이 아니라 미국에 대한 굽신거리는 항복 선언”이라고 비판했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