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도 이런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볼턴이 사심을 갖고 쓴 글을 어떻게 믿느냐”는 반응도 있지만 볼턴의 주관적 기술을 걸러내면 팩트의 얼개가 그려진다. 우리가 이 책을 주의 깊게 읽는 건 문재인 정부의 중재외교가 왜 파탄 일보 직전에 왔는지, 하노이 회담은 왜 실패했는지를 곱씹기 위해서다. 실은 우리 정부도 이미 답을 알고 있다.
김정은은 문재인 과신했고
문재인은 미국을 잘 몰랐다
트럼프만 믿은 게 실패 원인
임종석은 이런 에피소드까지 전한다.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2018년 3월 방북 뒤 백악관으로 날아가 “김정은이 비핵화 의지와 북·미 정상회담 의사를 밝혔다”고 설명하자 트럼프는 좌중에 있던 20여 명의 참모에게 반복해서 “거봐 내가 뭐랬어 (내 말이) 맞지?”라고 반복했다는 것이다. 북의 말을 믿고 싶어 하는 트럼프와 그에 부정적인 참모들 간에 의견이 쪼개져 있었다는 얘기다.
종합하면 청와대는 트럼프만 설득하면 북·미 회담 성과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아무리 주관이 뚜렷하고 셈법이 독특한 트럼프라도 논리로 무장한 참모들의 반대를 이겨내진 못했다. “미국은 톱다운이 아니더라”는 문 대통령의 발언은 “그때는 미처 몰랐어요”란 뒤늦은 고백으로 들린다. 북한은 체제 특성상 톱다운이 가장 효율적인 길이겠지만 미국은 톱다운만으로 작동하는 체제가 아니란 점을 간파하지 못했거나 간과했다는 얘기다. 볼턴뿐 아니라 펜스 부통령이나 폼페이오 국무장관도 섣부른 북·미 합의에 부정적인 입장에 섰다는 사실이 회고록 곳곳에 나온다. 그 많은 미국 유학 출신 참모들은 대통령에게 뭘 자문했는지 의문이다.
문제는 볼턴의 회고록에 나오지 않는 부분, 즉 남과 북 사이에 오고 간 얘기들의 진상이다. 아직 베일에 가려진 부분이 많지만, 북한은 하노이에서 영변과 제재 해제의 교환에 실패한 뒤 “남한 말을 믿었던 게 패착”이라고 분개했다는 게 북한 소식통과 전문가들 사이의 정설이다. 반면에 트럼프는 정상회담에 응하면서도 끊임없이 북한의 의도를 반신반의하며 자신이 얻을 정치적 과실과 저울질했다. 그 결과 하노이에 가기 전부터 ‘배드딜’보다는 ‘노딜’에 기울어져 있었다. 임종석도 이를 인정한다. 그런 트럼프에게 김정은은 끝까지 ‘+α’는 없다고 버텼으니 결과는 뻔했다.
하노이 실패의 원인은 그리 복잡한 게 아니다. 김정은은 문재인을 너무 믿었고, 문재인은 미국을 몰랐다. 문재인이 김정은을 구슬리는 데 성공했는진 몰라도 트럼프는 올 듯 말 듯 하면서도 끝내 선을 넘어오지 않았다. 그것을 ‘전쟁광’ 볼턴 한 사람의 훼방 탓으로만 몰아가는 건 전체 판을 못 본 것이다.
예영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