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YS, 이회창, 박근혜 모두 중용한 '강단있는 신사' 홍사덕

중앙일보

입력 2020.06.18 19:16

수정 2020.06.18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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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관은 뚜렷했다. 그러나 사고는 유연했다”(정진석 미래통합당 의원)

 
17일 밤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홍사덕 전 국회부의장을 정치권에서 회고하는 시선은 ‘강단 있는 신사’다. ‘무슨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느냐’는 질문에 “나는 민족주의자”(『새천년을 여는 정치』)라고 단언할 만큼 주관이 뚜렷했지만, 국회의원 가운데 가장 신사적인 의원 10명을 뽑아 주는 ‘백봉신사상’을 1999년(1회)~2004년(5회)까지 내리 5년간 받았다.

 

“흉년기에 조밥” , 이건희 회장과 60년 지기

홍사덕 전 의원이 2003년 한나라당 원내총무 시절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중앙포토]

고인은 경북 영주 소백산 기슭의 ‘속수’라는 마을에서 1943년 태어났다. 그곳에서 해방, 6ㆍ25전쟁을 맞았다. 가난은 숙명이었다. 어릴 적 소풀을 먹이고 집에 가면 조부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너는 흉년이 들더라도 여름에 조밥은 먹을 수 있도록 해라”고 말한 걸 그는 노년기까지 기억했다. 고향을 떠난 건 고교(서울대 사대부고) 때다. 동창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이때 60년 지기의 친분을 쌓았다. 이 회장이 1997년 쓴 『이건희 에세이,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는 당시 정무1장관(김영삼정부)이었던 고인이 쓴 ‘내가 만난 본 이건희 회장, 애벌레 시절 이야기’가 소개돼있다.
 
“고등학생 이건희 군은 근엄하기는커녕 엉뚱하고 싱거운 친구였다. 앞장서 가던 그가 ‘배고프다’면서 끌고 간 곳은 군용 천막 안의 즉석 도넛 가게. 시골 촌놈인 내 눈에도 완벽하게 비위생적인 곳이지만 그는 털쩍 주저앉아 잘도 먹어 치웠다. 그의 아버지 함자는 물론, 얼마나 엄청난 부자인지 전혀 알지 못했던 나는 속으로 ‘녀석, 가정 형편이 우리 집 수준밖에 안 되는 모양’이라고 단정했다.”


 
고인의 책 『지금 잠이 옵니까?』에는 삼성 창업주인 고(故) 이병철 회장과의 일화도 등장한다. 1966년 장충동 자택에서 ‘한일협력자금(6억 달러) 분배에 따라 재계 모습이 달라지지 않겠느냐’고 이 회장에게 물었을 때 이 회장이 “그 돈을 다 써도 내 구상의 2%도 안 된다”고 답했다는 일화다. 그는 이후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 해병대 군 복무를 마친 뒤 중앙일보에서 외신(국제)ㆍ경제ㆍ정치부 기자를 했다.

 

정치 입문과 신민당 공중분해

1986년 신민당 당사에서 브리핑 중인 홍사덕 전 국회부의장 [중앙포토]

정치에 입문한 건 전두환 정권 시절인 11대 총선(1981년)에서다. YS(김영삼)계 김덕룡 전 의원을 통해서였다. 민한당의 YS계 실세가 김 전 의원에게 “어디 좋은 사람이 없느냐”라고 물었고 김 전 의원이 서울 문리대 동기인 그를 추천했다고 한다. 민한당에서 정치의 첫 발을 들인 그는 1985년 YS의 신한민주당(신민당) 창당에 동참했고 재선 의원(12대)이 됐다.

 
1986년에는 당 대변인직을 맡아 이민우 당시 신민당 총재의 최측근으로 발탁됐다. 1년 9개월 남짓 고인은 ‘이 총재의 자택으로 매일 출근해 아침을 먹었다’고 회고했다. 이민우 총재는 그해 12월 ‘선(先) 민주화 후(後) 내각제 협상 용의’란 발언으로 정국을 뒤흔들었다. ‘대통령 직선제’를 원했던 당의 대주주 YSㆍDJ(김대중)가 반발, 상도동ㆍ동교동계 현역 의원 67명이 탈당하며 신민당은 공중분해 된다. 당 공중분해를 촉발한 이 총재 구상의 이면에 고인이 있다고 알려진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1988년 당시 뒷얘기에 대한 언론 취재요청이 있었지만 ‘야당을 이끄는 두 사람이 다치면 안 된다’고 이 총재가 걱정했다”고 술회했다. 
 
고인은 결국 13대 총선(1988년)에선 YSㆍDJ와 갈라선 채 무소속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낙선 뒤엔 정치평론의 길을 걸었다. 1988년 10월 “내가 과연 그런 능력이 있느냐는 지극히 상식적인 자문에서부터 고민이 깊었다”며 시작한 ‘홍사덕 라디오 칼럼’은 큰 화제를 불렀다. 이후 5권의 『홍사덕칼럼』으로 묶여 나왔다.
 

DJ도, YS도, 이회창도 중용

2000년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선대위원장 시절 홍사덕 전 부의장 [중앙포토]

다시 정치를 시작한 건 낙선 2년 뒤인 1990년 '꼬마민주당'에 입당하면서다. 1992년 대선에서는 DJ 후보 진영의 대변인을 맡았다. 동교동계의 몇 안되는 영남 출신 의원이었던 그는 당시 나름의 정치적 입지를 쌓았지만 3년 뒤 탈당해 1996년 무소속으로 출마, 4선 의원이 됐다. “그의 지역구(서울 강남을)인 강남 아파트 지역에서 민주당 간판으로는 당선되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권노갑 전 의원)이라는 증언이 있다.

 
이후 1997년엔 YS 정권에선 정무장관을 지냈다.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는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당시 이회창 총재가 선대위원장으로 영입했다. 원래 지역구(서울 강남을)는 오세훈 전 서울시장에게 물려주고, 비례대표 2번을 받아 당선됐다. 5선으로 그는 이때 국회부의장도 지냈다. 2004년 한나라당 원내총무를 지내며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두고 ”DJ의 햇볕정책은 북한의 개혁ㆍ개방을 목표로 삼았는데, 노 대통령에게선 이를 찾아볼 수 없다“고 혹평했다. 당시 노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주도했고, 이후 ‘탄핵 역풍’으로 17대 총선에서 낙선했다.

 
2005년 재ㆍ보선 공천에서 탈락한 후 한나라당을 탈당했다. 2007년 한나라당 박근혜 대선예비후보선대위원장을 맡았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 친박연대 소속으로 당선(6선)된 뒤 한나라당에 복당했다. 이후에는 원내에 진입하지 못했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 서울 종로에 출마했지만,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 정세균 국무총리에게 패배했다. 이후 KT 고문과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대표상임의장을 역임했다.

 

동료 정치인들이 기억하는 홍사덕

미래통합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18일 오후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홍사덕 전 국회부의장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 [뉴스1]

별세 이튿날인 18일 연건동 서울대병원 고인의 빈소에는 문재인 대통령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조화가 나란히 놓였다. 박병석 국회의장,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 원희룡 제주지사, 홍준표 무소속 의원 등 여야 정치인들의 발길도 이어졌다. 김종인 위원장은 조문한 뒤 기자들과 만나 “11~12대 국회의원을 함께 하며 가깝게 지낸 분인데 2017년 이후 못 봤다. 이렇게 빨리 가실 거라는 상상을 못 했다”고 안타까워했다.

 
고인과 가까웠던 정진석 통합당 의원은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투쟁 일변도는 아니면서도 자기 나름의 중심과 철학은 분명한, 한 마디로 댄디한 분이셨다”며 “부의장을 하실 때도 항상 ‘○○지역의 자랑스러운 대변자 ○○○의원 나와달라’고 소개했는데 정겹고 친근했다. 12대 국회부터 본 의장단 가운데 가장 특별했다”고 기억했다.

 
유족으론 배우자 임경미씨, 아들 재선, 딸 은진ㆍ세나씨가 있다. 발인은 20일.

 
한영익ㆍ윤정민 기자 hanyi@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