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국·한국서 만든 세계지리지
아편전쟁 직후 나온 『해국도지』
세계지리·무기지식 100권에 담아
조선 후기 윤종의의 『벽위신편』
영해 지키려는 방대한 정보 모아
조선 지도에 명기된 ‘동해’ 흥미로워
아시아 지도로 들어간다. 전체 지도에 이어 나오는 첫 번째 지역 지도는 조선국이다. 신기하게도 조선을 셋으로 나눠 북계도(北界圖)·중계도(中界圖)·남계도(南界圖)를 그렸다. 이렇게 자세하게 그린 나라가 드물다. 『해국도지』에서 조선국 지도를 펼쳐 놓고 관악산과 백악산을 찾고 죽령과 조령을 찾고 춘천과 가평을 찾는 지명 찾기 놀이를 해도 좋을 정도다. 조선국 지도에 ‘동해’가 명기돼 있다는 것도 흥미롭다.
일본국 지도는 아시아 지도에서 거의 끝에 있다. 놀라운 것은 여타 지도에서 볼 수 있는 산과 강의 지형 표시와 명칭 표기가 전연 없다는 점이다. 단지 주 이름과 섬 이름이 배열돼 있을 뿐이고 드문드문 일본국 임금이 산다거나 금과 은이 난다는 설명이 적혀 있는 정도다. 일본 전국시대에 친숙한 독자라면 월후주(越後州)·갑비주(甲斐州) 등의 이름에서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다케다 신겐(武田信玄) 등의 인물을 떠올릴 수 있겠다.
이 문제는 쉽지 않다. 다만 일본도 원래는 조선처럼 지지가 없었는데 증보판을 내면서 ‘동남양’ 항목에 추가됐다. 중국의 해방(海防·외적의 침입을 바다로부터 방어)이라는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에 관한 지식도 요청된 것이다. 동아시아 해역사의 시각에서 명나라 말기 일본의 관련 기록이 수집됐고, 그 안에는 왜구와 왜란도 포함됐다. 일본도 해국이고 임진왜란도 아편전쟁이라는 뜻이었을까.
『열하일기』로 유명한 박지원의 외사촌 이정리(李正履)에게 배운 그는 조선의 척사(斥邪)와 조선의 해방(海防)을 위한 지식의 집적에 필사적이었다. 이 책은 『해국도지』에 없는 중국 연해 상세 지도와 조선 연해 상세 지도 수십 면을 갖췄다. 중국과 조선의 연해에 관심을 집중했다.
청·일전쟁은 중국의 새로운 재앙이었다. 중국과 조선의 바다에서 북양함대가 궤멸됐다. 일본에 패배한 중국은 제국주의 열강에 포위돼 분할의 위기에 직면했다. 이 무렵 『해국도지』가 저물고 『태서신사남요』(1895)가 떠올랐다. 서양 선교사 이제마태(李提摩太·티모시 리처드)는 이 책을 통해 중국 사회에 서양의 새로운 독법을 일러주고자 했다. 중국은 부강을 원하는가? 서양을 알아라. 서양을 알고 싶은가? 19세기 서양사를 읽어라. 영국의 새 역사에 답이 있다.
유학자 권상규 “원한의 피바다가 됐다”
이 책은 조선에서도 인기를 누렸다. 대한제국 학부가 복각한 이 책 안에는 이제마태의 세계지도가 삽입돼 있었다. 『해국도지』의 세계지도와 비교하면 다대한 변화가 있었다. 대동양이 태평양으로, 대여송이 서반아로, 동해가 일본해로 바뀌었다. 가장 중요한 변화가 있다. 이 지도는 세계 각지에 점선과 실선을 그어 제국주의 열강의 세계 분할을 표시했다. 영국·러시아·프랑스·독일·미국·네덜란드의 지배를 표시하는 선이었다. 침략과 식민의 섬뜩하고 끔찍한 세계지도였다.
조선 유학자 권상규(權相圭·1874~ 1961)는 『태서신사남요』를 읽고 독후감을 남겼다. “지난날의 이용후생 기술이 성시(城市)와 인민을 도륙하는 기계로 변했고 강력하고 혹독한 폭탄이 거듭된 연구로 갈수록 신기해졌으며 날마다 먼지가 자욱한 전장은 원혼의 피바다가 됐다.” 영국 근대사라는 복음서를 전하고자 했던 이제마태의 의도가 무색하게 제국주의 서양 세력이 세계를 침략하고 문명을 파괴하고 있음을 비판하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근대화론에 취해 무한 질주해왔던 20세기에 이러한 성찰이 통할 수 있었을까.
선이 진화하면 악도 진화한다고 했다. 중국 사상가 장빙린(章炳麟·1869~1936)의 유명한 ‘구분진화론’(俱分進化論)이다. 근대에 진화한 ‘악의 세계사’는 제대로 반성된 적이 있었는가. 제국주의·군국주의·식민주의·인종주의는 지금도 활보하고 있지는 아니한가. 코로나 재앙을 만나 옛날 전염병을 찾는 것도 좋지만 이 병든 세계의 진짜 속병을 고쳤으면 좋겠다.
미국은 미리견국, 뉴욕은 신약으로 표기
동부에는 ‘신약’(新約·뉴욕), ‘이리내’(以利乃·일리노이), ‘금돌기’(金突其·켄터키), ‘로의철나’(路義撤拿·루이지애나), ‘미치안’(米治安·미시건) 등 여러 주 이름이 보인다. 미시건은 1837년 미국의 26번째 주가 됐고 미국 지도에 반영된 최신 정보였다. 서부에는 행정 구역 이름이 없이 단지 ‘미소리 땅’(米蘇利地·미주리), ‘아리옹 땅’(阿利翁地·오리건), 그리고 ‘락기’(落機·록키)산맥 왼편에 ‘만족 땅’(蠻族地·원주민 거주지, 시애틀이 있는 워싱턴주)이 적혀 있는 정도다.
텍사스와 캘리포니아는 미국 지도가 아니라 멕시코 지도에 보인다. 미국은 1845년 텍사스 공화국을 합병하고 1848년에는 멕시코로부터 캘리포니아를 양도받았다. 『해국도지』의 미국 지도는 1830년대에서 멈추었다. 미국 무장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조선 평양에서 난동을 부렸을 때(1866), 미국 아시아 함대가 조선 강화도에 침입했을 때(1871), 이 낡은 지도는 얼마나 쓸모가 있었을까.
노관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