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사람이라면, 자기 자랑으로 점철된 자서전이라도 참고 읽겠다고 마음먹었다. 한데 지난달 나온 밥 아이거의 『디즈니만이 하는 것』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미사여구로 치장한 경영철학 대신 1인자가 되기 이전에, 누군가를 ‘모시고’ 일하던 시절의 경험담부터 흥미진진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특히 인상적인 건 직장상사들 얘기다. 결과물은 뛰어난데 매번 막판에 모든 걸 바꿔버려 주변을 힘들게 했던 방송사 간부, 전설적인 업적을 쌓았지만 말년에는 2인자 경계에만 골몰했던 선임 CEO, 그리고 기업을 인수한 새로운 소유주 혹은 오랜 창업주 자손과 최고경영진의 갈등 등을 아이거는 나름의 균형감각을 갖고 생생하게 묘사한다. 내심 승진을 기대했다 물을 먹거나, 낙하산 인사를 상사로 모시게 된 자신의 심경도 비교적 진솔하게 들려준다. 덕분에 일면식도 없는 저자가 꽤 괜찮은 사람처럼 친근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현실은 책과 달리 해피엔딩이 아니다. 이 책이 미국에서 처음 나온 지난해 가을은 누구도 코로나 팬데믹을 예상 못 할 때였다. 지금 디즈니가 처한 위기는 미국 전역의 영화관이 문을 닫고 영화 개봉이 줄줄이 연기된 것만이 아니다. 디즈니의 자랑인 테마파크도 일제히 문을 닫아야 했고, 방송사업의 효자인 스포츠 채널 ESPN도 전 세계 주요 경기가 중단되는 타격을 입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설상가상 디즈니는 크루즈 사업 확장에도 힘을 쏟았던 모양이다. 올 2월 CEO를 그만두고 회장으로 물러난 아이거가 위기상황을 맞아 두 달 만에 다시 디즈니를 진두지휘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만약 개정판을 낸다면, 그는 코로나 위기 극복담을 새로운 한장으로 추가할 수 있을까. 며칠 전 모처럼 영화관에서 한국영화 신작을 보고 나오는 길에 새삼 깨달았다. 코로나 이후 2020년의 세계에서 영화관 나들이는 결코 흔한 경험이 아니라는 걸.
이후남 문화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