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노동자의 죽음,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의 운명
유서에 적힌 직장 내 괴롭힘
직장서 괴롭힘 당하다 극단 선택
회사 뒷짐에 괴롭힘 인정 감감
아파트 경비원도 보호대상 안돼
최근 인권위 개선 권고, 법 바뀔까?
학창 시절 쾌활하고 배려심이 많았던 서씨는 입사 후 점차 말수가 줄기 시작했다. 힘들다는 말도 자주 했다. 가족들은 첫 사회생활이니 쉽지는 않을 것이라 다독였다. 석 달 만에 정규직으로 승격하자 적응도 잘하려니 했다. 그러던 지난 3월 17일 밤 비보가 날아들었다. 부랴부랴 익산에 도착해보니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영문도 모른 채 장례를 마친 유족들은 유품을 정리하다 유서를 발견했다. 넉장짜리 유서에는 “그만 괴롭혀” “다닐 곳이 못 된다”는 등 회사 일로 괴로워하던 내용이 담겨 있었다.
“경직된 조직문화는 인정하지만….”
유족들이 서씨 동료들을 수소문해 문자·대화 등을 추적하면서 서씨가 겪은 일들이 속속 드러났다. 이 회사 분위기가 기존 직원들의 텃세가 심해 신입직원들이 견디기 힘들었다고 한다. 정규직으로 전환되고, 사내연애 사실이 알려지며 따돌림과 험담은 더 심해졌다. 남자 친구와 찍은 사진을 개인 SNS에서 내리라는 요구까지 받았다. 올 초 공장의 한 제품라인에서 불량이 나자 서씨는 며칠씩 퇴근 후 불려가 시말서를 쓰기도 했다. 근무조를 갑자기 바꿔 말할 사람도 없어졌다고 지인에게 호소했다. 그리고 얼마 뒤 서씨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심지어 지난해 남성 상사로부터 성희롱을 당했다는 동료의 증언도 뒤늦게 나왔다.
사연이 알려지면서 민주노총 전북본부가 적극 돕기 시작했다. 구례엔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현수막이 곳곳에 내걸렸다. 이곳을 비롯해 목포와 나주·순천 등에선 1인 시위가 시작됐다. 당초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부인하던 회사도 “해당 공장의 조직문화가 경직된 것은 인정한다”며 조금 태도를 바꾸었다. 하지만 “내부 조사결과 고인의 죽음은 회사와 관계가 없다”는 입장은 그대로다.
유족 측은 광주지방노동청 익산지청에 진정도 냈다. 첫 반응은 일방적인 주장을 다 믿을 수 없다며 증거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시민단체가 조사 내용을 토대로 추가 고발을 하자 현장조사에 나섰다. 익산지청 관계자는 “제기된 의혹을 물어도 회사 측에서 순순히 인정하는 경우는 드물다”며 “사실 확인에 시간이 다소 걸린다”고 말했다.
‘방치법’ 된 ‘괴롭힘 방지법’
노동계에선 법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피해가 발생하면 사용자에게 신고하도록 하고, 조사와 조치도 사용자가 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의무만 규정해놨지 어길 때 처벌하는 규정이 없다. 고용부 관계자는 “처음 발의된 법안엔 처벌조항이 있었지만, 국회 분위기가 그대론 법 통과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어서 결국 빠졌다”고 전했다.
특히 가해자가 사용자일 경우 신고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고용부는 이럴 땐 지방 노동청에 직접 신고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현장에선 다시 사용자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끝없는 도돌이표다. 조사 기간은 2개월. 그동안 피해자는 지쳐가고, 결국 없던 일로 묻고 취하하는 경우도 많다. 법 시행 후 지난 4월까지 고용노동부에 모두 3347건의 직장 내 괴롭힘 민원이 접수돼 2739건이 처리됐다. 말이 처리지 절반(1312건)은 취하됐고, 910건은 법 시행 전에 발생했거나 적용대상(5인 이상 사업장)이 아니라는 이유로 조사도 못 하고 종결됐다. 실제 조사가 진행돼 개선 권고까지 이어진 것은 495건, 이중 검찰에 송치한 사건은 22건에 그쳤다.
한계가 명확하고 불만도 많다는 점은 고용부도 알고 있다. 그래서 지난해 9월, 직장 내 괴롭힘이 확인된 작업장에 대해 특별근로감독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문제가 제기된 회사는 다른 노사관계 법령도 어겼을 가능성이 크다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괴롭힘이 있었다는 게 확정돼야 감독이 시작된다. 민주노총 전북본부 이준상 조직부장은 “서씨 사건처럼 유서와 증언들이 쏟아진 사건도 두 달간 결론을 못 내리는데 증거를 잡기 어려운 은밀한 괴롭힘과 부당지시는 사실상 확인하는 게 불가능한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오진호 직장갑질119 총괄스텝은 “이대로 두면 괴롭힘 방지법은 ‘방치법’으로 굳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또다른 죽음과 인권위 권고
경비원뿐 아니라 프리랜서나 고객을 많이 상대하는 콜센터, 백화점 판매원들이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다. 직원 5인 미만 사업장 역시 대상이 아니다. 법은 직장 내 폭력과 괴롭힘을 미리 예방하자는 취지지만 가장 취약한 보호대상의 절대다수가 사각지대에 놓인 셈이다.
지난달 24일 국가인권위원회가 관련 제도를 개선하라고 권고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두 노동자의 죽음이 한창 사회문제화했던 시점이다. ▶최씨 경우처럼 사용자가 아닌 고객이나 원청 관계자, 입주민이 괴롭힐 경우에 대한 대책 마련 ▶4인 이하 사업장으로 법 적용 확대 ▶처벌규정 신설 ▶가해자가 회사 대표나 그 친인척일 경우 외부 조사 방안 마련 등 그동안 노동계에서 요구한 내용이 모두 포함됐다.
아직 최종 의결 절차가 남았지만 조만간 고용노동부에 정식 권고가 전달될 전망이다. 고용부는 이에 대해 수용 여부를 답해야 한다. 고용부 오영민 근로기준정책과장은 “아직 공식 통보가 안 와서 뭐라 말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그동안 고용부 내에서도 고민하던 내용”이라고 밝혔다.
고용부 측에선 괴롭힘 문제는 처벌보다는 결국 회사 문화가 바뀌어야 해결된다고 본다. 법에도 이런 인식이 반영됐다. 하지만 노동계에선 외부적 자극 없이 오래된 관습이 바뀌지 않는다고 본다. 2007년 신설된 직장내 성희롱 금지 규정(남녀고용평등법)이 대표적인 사례다. 직장갑질 119 오진호 총괄 스태프는 “처벌 사례가 나오고 지속해서 예방 교육이 이뤄지면서 적어도 성희롱으로 문제가 되면 개인과 회사는 모두 망한다는 인식이 퍼졌다”며 “강력한 법이 강력한 예방 효과를 발휘한다”고 평가했다.
최현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