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가방 열자 5만원권 쏟아졌다…청약규제에 다운계약 판쳐

중앙일보

입력 2020.06.11 09:16

수정 2020.06.11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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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말 경기도 광주시의 한 부동산 중개업소 사무실. 아파트 분양권을 산 A 씨는 작은 여행용 캐리어를 열고 5만 원권과 1만 원권 돈다발을 꺼내 B 씨에게 건넸다. 
 
이 중개업소에서 일하는 C 씨는 지폐를 세는 기계로 돈다발을 하나씩 셌다. 다발마다 지폐가 100장씩 묶여 있었다. 5만 원권 다발 10개와 1만 원권 다발 30개, 총 8000만원이다.  

웃돈 1억인데 계약서엔 1000만원만
양도세 아끼려 수천만원 다운 계약서
적발시 덜 낸 세금에 과태료까지 부과

A씨가 이 분양권을 사기 위해 지불한 돈은 계약금 4600만원과 웃돈 9000만원까지 1억3600만원이다. 이 중 5600만원은 B 씨에게 계좌 이체를 했고 8000만원은 현금으로 건넸다. 계약서에 웃돈을 1000만원만 준 것으로 썼기 때문이다. 
 
이른바 ‘다운 계약’이다. C 씨는 “주인이 다운 계약이 아니면 계약하지 않겠다고 해 사장이 A 씨를 설득해 계약을 성사시켰다”며 “많은 현금을 넣을 곳이 마땅찮으니 요새는 캐리어에 담아 가져온다”고 말했다.  
 
아파트 청약 시장에 이어 분양권 시장까지 달아오르면서 다운 계약이 판을 치고 있다. 새 아파트에 당첨되지 못한 청약 수요가 분양권 시장으로 몰리면서 웃돈이 오르고 매물이 귀해지자 다운 계약까지 등장한 것이다.  


청약 경쟁 치열해지자 분양권으로 수요 몰려

 
8월부터 사실상 전국에서 아파트가 완공(소유권이전 등기)될 때까지 분양권을 거래할 수 없게 된 영향도 크다. 국토교통부는 지난달 규제지역이 아닌 수도권 및 지방 광역시 민간택지에서 건설·공급되는 주택의 전매제한 기간을 소유권 이전 등기 시까지로 강화한다고 밝혔다. 현재 수도권 과밀억제권역 및 성장관리권역과 지방 광역시 도시지역의 민간택지 전매제한 기간은 6개월이지만, 8월부터 확대 적용된다.
 
다운 계약은 그간 벗어나 있다가 이번에 규제를 받게 된 지역에서 활발하다. 대표적인 지역이 경기도 평택·안산·인천 등지다. 이들 지역은 현재 당첨자 발표 후 6개월이 지나면 분양권을 전매할 수 있다. 
 
올해 들어 이들 지역의 분양권 거래는 확 늘었다. 경기도에 따르면 지난 1~5월 광주시 분양권 거래(468건)는 지난해 같은 기간의 2.8배 수준이다. 평택시도 지난해의 2배인 2733건이 거래됐다. 안산시(885건), 의정부시(599건), 파주시(501건), 양주시(366건)도 지난해보다 50% 이상 거래가 늘었다.
 
그간 해당 지역의 일부 거래가 다운 계약으로 이뤄졌다면 최근엔 지역 전체가 다운 계약을 하는 상황이다. 지난 3월부터 전매할 수 있게 된 경기도 광주시 오포 더샵 센트럴포레 84㎡형(이하 전용면적)의 국토부 실거래가를 살펴보면 3월 1일부터 현재까지 거래 가격이 4억4993만~5억1701만원이다. 
 
이 아파트 분양가는 4억5847만~4억6750만원이다. 가격 차이가 854만~4951만원이 난다. 하지만 실제 웃돈은 8000만~1억2000만원이다. 광주역 태전 경남아너스빌 73㎡형도 실거래가 상으로는 3월부터 분양가보다 2000만~3000만원 비싸게 거래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웃돈이 8000만원 이상이다.
 
다음은 기자와 분양권 거래를 중개하는 공인중개사의 전화 통화 내용이다.   
 
기자 “다운(계약을) 안 할 수는 없는 건가요?”
공인중개사 “사모님, 다운(계약) 안 하는 물건은 없어요. 계약 못 하세요.”
기자 “얼마나 싸게 계약해야 하는 건가요?”
공인중개사 “2000만~3000만원 적으시면 돼요.”
기자 “피(웃돈)가 1억인데 7000만~8000만원을 낮게 써서 계약하라고요?”
공인중개사 “네.”
기자 “그러면 제가 나중에 팔 때 불리한 거 아닌가요.”
공인중개사 “1주택자 아니세요? 어차피 (양도세) 비과세 받으니 상관없어요.”
 
평택시도 사정은 비슷하다. 지난 4월부터 분양권을 거래할 수 있게 된 세교동 지제역 더샵 센트럴시티는 분양가(평균 4억3000만원)보다 1억원 이상 비싸게 거래되고 있지만, 이달 실거래신고 가격은 분양가와 비슷한 4억2190만~4억5740만원이다. 평택시의 한 중개업소 관계자는 “실제 거래 가격으로 계약하면 국토부 실거래가 시스템에서 내가 중개한 물건만 톡 튀어서 당장 단속 나오고 나는 이 동네에서 영업 못 한다”고 말했다.

 

양도세 아끼려 다운 계약 조건 걸어 

 

서울의 한 중개업소 전경. 연합뉴스

다운 계약을 하는 이유는 세금 때문이다. 대개 매도자가 양도소득세를 아끼려고 제안한다. 예컨대 계약한 지 6개월이 지나서 전매가 풀린 분양권을 웃돈 1억원에 거래한다면 양도세가 50%라 5500만원(지방소득세 5% 포함)을 내야 한다. 그런데 1000만원으로 다운 계약을 한다면 550만원만 내면 된다. 
 
매수자 입장에선 자칫 매도자가 아낀 세금 폭탄을 맞을 수 있다. 예컨대 실제 6억원에 산 아파트를 5억원으로 다운 계약했다가 7억원에 팔면 실제 시세차익인 1억원이 아니라 2억원에 대해 양도세가 부과되기 때문이다. 
 
대부분 매수자가 양도세 비과세 대상인 1가구 1주택자인 이유다. 안산시의 한 중개업소 관계자는 “어차피 비과세라 얼마가 올라도 타격이 없어서 거래가 가능한 것”이라며 “이전에는 다운 계약을 조건으로 웃돈을 좀 깎아줬는데 요즘은 아예 다운 계약이 계약 조건”이라고 말했다.
 
매수자도 취득세를 아낄 수 있다. 예컨대 실제 매입 금액이 6억원이라면 아파트 완공 후 소유권 이전 등기를 할 때 취득세(1.1%)로 660만원을 내야 한다. 하지만 계약서에 1억원 싼 5억원으로 기재하면 550만원만 내면 된다. 
 
다운 계약이 적발되면 거래가 무효가 되진 않지만, 많은 과태료를 내야 한다. 우선 탈세한 양도세와 취득세를 추가 납부해야 하고 탈세액의 40%인 신고 불성실 가산세, 탈세액을 미납했던 기간에 따라서 연 10.95%의 납부 불성실 가산세도 부담해야 한다. 
 
실거래가 신고의무 위반으로 취득세의 3배 이하, 양도가격의 5% 이내 과태료도 부과된다. 다운 계약을 중개한 공인중개사는 업무 정지나 아예 공인중개사 자격이 박탈될 수 있다. 다운 계약을 자진신고 하며 과태료를 내지 않아도 되지만, 탈세한 양도세나 취득세는 내야 한다. 
 
최현주 기자 chj80@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