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당신처럼 광활한 미국 서부에서 자라 21살에 한국으로 갔습니다. 당신은 그보다 어린 20살에 자신의 선택이 아닌 의무로 한국에 갔지요. 당시 미국 남성들은 병역의 의무가 있었으니까요.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38선을 넘자 트루먼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방어한다는 중대 결정을 내렸습니다. 갓 20살이 된 당신은 그해 7월 3일 24사단 34보병대대의 일원으로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평택에 있는 당신의 대대는 7월 6일 북한군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5시간을 버텼지만 결국 천안으로 후퇴했습니다.
20살 앳된 나이로 한국 지키다 숨진
그의 희생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
양국민이 그에게서 영감·겸손 얻어
역사적 과제 위한 동행 다시 나서길
그러나 당신은 낙동강에 닿지 못했지요. 당신은 1950년 7월 30일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다른 많은 한국인과 미국인들처럼 당신의 삶은 전쟁의 끔찍한 도입부에서 끝났습니다. 1950년 7월 당신은 무슨 생각을 했나요. 전장은 계속 남하하고 병력과 화력은 열세에다 체계도 없던 그때, 고통과 파괴 그리고 당신을 둘러싼 죽음을 바라보던 그때 말입니다.
저는 그후 수 십 년 동안 한국의 도약을 직접 지켜봤습니다. 온갖 역경에도 불구하고 경제 번영과 탄탄한 민주주의를 이뤄내는 것을 지켜봤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유대와 가치 공유로부터 나오는 활력이 안보와 경제 협력을 튼튼하게 해 한·미 관계의 폭이 더 넓어지는 것을 봤습니다. 당신이 직접 목격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어떻게 한국인들이 지난 70년 동안 미국과 동행했는지, 어떻게 우리가 친구를 넘어 동반자가 됐는지 알 수 있었을텐데요. 특히 전세계가 심각한 사회·경제적 위기를 겪고 있고 미국 국내에서는 평등·정의·인권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우리 스스로 투쟁을 재개하는 요즘 같은 때 말입니다.
파커 일병. 몬태나에 있는 가족에게 돌아와 당신의 삶을 살았다면, 그래서 지금쯤 호숫가에 사는 제 90살 이웃이었다면 정말 좋았을 거에요. 우리는 물수리가 수면 위를 날아 다니고 산봉우리 위로 치솟는 것을 보며 과거와 미래에 대한 담소를 나눴겠지요. 당신의 인생이 너무 빨리 끝난 것에 애도를 표합니다. 1953년 정전협정이 맺어졌지만 불만족스럽고 불완전했습니다. 한반도와 우리가 사랑하는 미국에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일들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은 세계에서 존경받는 나라로 부상했습니다. 이는 정전협정 후 한국 전쟁의 희생을 ‘무승부를 위한 죽음(Die for a tie)’이라 폄훼했던 것이 틀렸음을 증명합니다.
워싱턴 DC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관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어요. “조국은 전혀 몰랐던 나라,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부름에 응했던 우리의 아들과 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파커 일병. 6월의 어느 아름다운 날 당신의 묘비에 꽃을 놓으며 소망합니다. 2020년 한·미 두 나라 국민들이 당신의 희생에서 영감과 겸손을 얻고 역사적 과제에 결의와 지혜로 맞서기 위해 다시 함께 나서기를 말입니다.
진심을 담아, 캐슬린 스티븐스 올림.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국대사·한미경제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