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한 자는 무죄, 상황극 만들어 유도한 자는 징역13년

중앙일보

입력 2020.06.04 15:41

수정 2020.06.04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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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으로 상황극을 꾸며 애먼 여성을 성폭행하게 한 남성에게는 중형이, 실제 성폭행을 저지른 남성에게는 무죄가 선고됐다. 

 대전지법 형사 11부(김용찬 부장판사)는 4일 주거침입 강간 교사 등 혐의로 기소된 A씨(29)에게 징역 13년과 성폭력예방교육 80시간 이수, 10년간의 아동·청소년 관련 기관 취업 제한을 명령했다. 주거침입 강간 등 혐의로 기소된 B씨(39)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 

대전지방법원 전경. [중앙포토]

 
 재판부는 "A씨가 피해자가 거주하는 빌라의 집 주소와 현관 비밀번호를 알아낸 다음 B씨에게 '강간상황극'을 알려주고 엽기적인 범행을 하게 한 다음 이를 지켜보는 대담성까지 보였다"며 " 피해 여성은 그 충격으로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재판부는 "A씨는 '강간 상황극' 피해자 이외에 다른 자동차 앞 유리에 적혀있는 여성들의 휴대전화 번호를 알아내 수치심과 공포심·불안감을 느낄 만한 문자메시지 등을 보내는 등 죄질이 나쁘고 피해자도 처벌을 원한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대전지법, 강간 교사 등 혐의 기소된
20대 남성 징역 13년, 성폭행자 무죄
20대 남성, 여성 사는 빌라 주소와
현관문 비밀번호 알려줘 성폭행 유도

 이와 함께 재판부는 "증거를 종합해 보건데 B씨는 자신의 행위가 강간이라고 알았다거나, 아니면 알고도 용인했다고 볼 수는 없다"며 "이씨에게 속은 나머지 강간범 역할로 성관계한다고 인식한 것으로 보여 공소사실을 유죄로 판단할 근거가 부족하다"고 판시했다.
 
 A씨는 지난해 8월 랜덤 채팅 앱 프로필을 '35세 여성'으로 꾸민 뒤 '강간당하고 싶은데 만나서 상황극 할 남성을 찾는다'며 올린 글에 관심을 보인 B씨에게 집 주변 원룸 주소를 일러줘, B씨가 원룸에 사는 여성을 성폭행하게끔 만든 혐의로 기소됐다. 두 남성과 피해자까지 세 사람은 서로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였다.
 
 A씨는 B씨가 피해자 집에 침입한 직후 원룸에 찾아가 범행 장면을 일부 훔쳐본 것으로 파악됐다. 사건 전 약 1주일 동안에는 아이디를 바꿔가며 피해자를 목표로 성폭행을 유도하는 글을 앱에 지속해서 올린 것으로 확인됐다. 검찰은 이런 행동이 피해자 인격에 대한 고려와 존중을 찾아볼 수 없는, 인간성 경시를 드러내는 방증이라고 했다.


 검찰 관계자는 "A씨는 익명의 탈 뒤에 숨어 인근에 혼자 사는 여성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며 "수법이 악랄하고 비인간적"이라고 했다. 죄의식 없이 장난처럼 여겼던 A씨에게 더 무거운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대전지방검찰청 청사. [중앙포토]

 
 A씨 측은 재판 과정에서 "(B씨를) 골탕 먹이려 했을 뿐 실제 성폭행 사건으로 이어질 것으로는 예상하지 못했다"며 "피해자에게 사죄하며, 채팅 앱에 대한 경각심을 갖고 살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B씨 변호인은 "A씨에게 너무나 완벽히 속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며 "강간 상황극에 합의한 의사만 있었을 뿐 강간하려는 고의는 없었다"고 해명했다.  
 
 이 사건과 별개로 A씨는 주거지 인근에 주차된 차량에서 다른 여성의 전화번호를 알아낸 다음 20여 차례에 걸쳐 음란 메시지를 보낸 혐의도 받았다. 검찰은 A씨(29)에게 징역 15년, 주거침입 강간 등 혐의로 기소된 B씨(39)에게 징역 7년을 각각 구형했다.
 
대전=김방현·신진호 기자 kim.banghyu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