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왜 16년 전 ‘5·18’의 어두운 기억을 꺼냈는지에 대해선 짐작하기 힘들다. 아마도 희미해지는 기억을 붙잡고 싶었을 거다. 먹고 살기 딱 적당한 호황이 찾아온 그 무렵은 모든 게 흐릿하던 시절이었다. 95년 12월 5·18 특별법이 통과됐지만 타인의 아픈 기억을 붙잡을 수 있을 만큼의 작은 틈은 어디에도 없었다.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의 요구가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이었다. 5월이 찾아오면 그가 생각나는 건 가까운 누군가가 계엄군의 총에 사망했다는 고백 때문이다.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5·6차 교육과정을 반영한 교과서는 5·18을 단 몇 줄로 설명했을 뿐이었다. 희생자 통계도 사건이 발생한 날짜도 없었다. ‘민주주의 헌정체제의 회복을 요구하는 시민들과 진압군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무고한 시민들도 살상돼 큰 충격을 안겨줬다’는 건조한 단어로 나열한 문장이 교과서에 기록된 게 전부였다.
24년 전 교탁 앞에 선 그는 80년 5월의 광주에 대해 크게 분노하지 않았다. 어떤 종류의 눈물도 없었다. 차곡차곡 쌓아둔 날것 그대로를 꺼내 들려줬을 뿐이지만 상당한 용기를 내야 했을 것이다. 어떤 종류의 사실은 꺼내 드는 것만으로도 큰 결단이 필요한 법이다. 아마도 그게 그만의 추모 방식이었을 거다. 그는 트라우마에서 벗어났을까.
다시 5월이다. 그동안 몇 개의 법이 신설됐고 몇 명의 대통령이 추모식에 참석했다. 하지만 크게 달라진 건 없다. 진실과 거짓은 40주년이 된 올해도 충돌했다. 그럴싸한 모습으로 치장한 거짓은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는다. 맞은 편엔 체념과 슬픔이 쌓인 진실이 서 있다. 과거를 부정하려는 거짓의 탐욕을 멈춰 세울 국민적 합의를 찾아 나설 때다.
강기헌 산업1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