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박정호 논설위원이 간다

[박정호 논설위원이 간다] 순간을 찍고 감흥을 읊고…시인이 따로 있나

중앙일보

입력 2020.05.06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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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시대의 문학 ‘디카시’

신록의 5월이 익어간다. 코로나19 대재앙으로 혹독한 시련을 겪은 올봄도 여름에 자리를 물려줄 채비를 하고 있다. 우리네 일상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바이러스의 공습으로 수많은 이웃이 아파했지만 산야를 수놓은 꽃들 덕분에 그나마 적잖은 위안을 받았다.
 
여기 울긋불긋 사진 한 장이 있다. 하늘을 향해 솟구치려는 붉고 노란 꽃들의 합창에 초록빛 잎새가 반주를 넣는 듯하다. 사진 가득 에너지가 넘친다. 하지만 시인의 눈은 남다르다. 평생 밭일을 하다 저세상으로 떠난 어머니가 입었던 몸빼바지를 기억한다.

사진과 만난 5행 안팎의 짧은 시
새로운 형식의 문학 장르로 부상
잡지·동호회·지역공모전 잇따라
“아직 사진설명 수준 많아” 일침도

사진과 시가 만난 디카시가 인기다. 단행본 『세상에 하나뿐인 디카시』(북투데이)에 실린 작품들.

‘몸매를 잊은 지 오래된 어머니가/일바지를 입고 밭고랑 논두렁으로/일흔 해 넘게 돌아다니다가 돌아가셨습니다./벗어놓은 일바지에 꽃들이 와서/꽃무늬 물감을 들여 주었습니다.’
 
공광규 시인의 ‘몸빼바지무늬’ 전문이다. 시인이 직접 사진을 찍고, 그에 대한 정한을 토해냈다. 5월 가정의 달, 지금은 얼굴을 볼 수 없는 부모님을 떠올리는 독자가 많을 것 같다. 최광임 시인은 이 시에 대해 이렇게 해설한다. “몸빼라는 말조차 예쁜 건, 저 유치찬란한 꽃무리가 아름다운 건 순전히 어머니가 상기시켜 준 그리움이기 때문이다.”
 
최 시인의 고향은 전북 부안군 변산이다. 그는 6년 전 유년의 추억이 깃든 고향집을 찾아가 사진 한 장을 찍었다. 허물어질 듯 낡은 집 앞에는 들깻잎만 무성했다. 그가 시 한 수를 붙였다.


‘낳고 기른 제 자식 앉힐 구들 한 장 온전치 못한/엄마 닮은 저 집엘 간다. 굽어 기운 다리로 겨우 걷는/구순 노모의 몸집처럼 낡은 기둥 가까스로 버티어 선/나 태어난 저 집엘 간다.’
 
최 시인의 고향집은 2년 전쯤 사라졌다. 하지만 그는 요즘에도 가끔 이 사진과 시를 꺼내보곤 한다. “이제 제가 다시 갈 곳이 없어졌어요. 어릴 적 깻잎을 팔아 아이들 학비를 대던 어머니를 생각하고 썼습니다. 아직 살아계신 어머니가 늘 고맙듯이 제 마음의 집도 두고두고 남겠지요.”
  
사진과 시의 비중 5대5 정도가 적당
 

사진과 시가 만난 디카시가 인기다. 단행본 『세상에 하나뿐인 디카시』(북투데이)에 실린 작품들.

사진과 시의 만남, 이른바 디카시(디지털 카메라+시)가 주목받고 있다. 시인이란 소수 집단을 넘어 일반인 사이에 빠르게 퍼지고 있다. 발아(發芽)한 지 채 20년이 되지 않았지만 관련 시집·문예지·강좌·공모전이 잇따르고 있다. 특히 스마트폰이라는 ‘만능장치’ 덕분에 사진의 문턱이 낮아지고, 여기에 자기가 찍은 사진에 대한 감흥을 읊고, 또 이를 주변에 쉽게 전달할 수 있게 되면서 디지털 시대, SNS 시대의 새로운 문학 장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디카시는 수천 년 내려온 시와 출발점이 다르다. 흔히 시인들이 삶에서 얻은 영감을 숙성·발전·완성한다면 디카시는 사진·영상 이미지가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 디카시는 SNS의 짧은 소통 방식에 맞게 보통 5행 이내로 제한되며, 그림과 글의 비중도 5대 5 정도다. 최광임 시인은 “사진과 시가 상보적 균형을 이뤄야 좋은 디카시가 된다. 훌륭한 사진이 꼭 필요한 건 아니다. 사진이 우세하면 문장이 죽고, 문장이 우세하면 사진은 보조에 그친다”고 설명했다.
 
디카시 인기의 1등 공신은 국내 보급률 95%를 넘은 스마트폰이다. 여기에 일반인의 글쓰기 욕구가 중첩되면서 문화계의 주요 트렌드로 떠올랐다. ‘폰카시’가 더 어울린다는 시각도 있다. 문화 소비자이면서 생산자, 소위 디지털 1인 미디어 시대의 문학적 변용, 혹은 진화다.
 
예컨대 포털 사이트 다음 카페에 2004년 개설한 ‘디카시 마니아’ 회원은 현재 1760여 명에 이른다. 추억의 시화전(詩畵展)이 디지털 광장에 모였다고나 할까. 카페지기 이상옥 시인(디카시연구소 대표)은 “2016년 디카시가 국립국어원 우리말샘 사전에 정식 용어로 등록되는 등 최근 2~3년 새 회원 수가 크게 늘었다”며 “디카시 대중화를 위해 지난해 6월 유튜브에 전문 방송도 열었다”고 했다. 올해 뉴스N제주가 국내 처음으로 도입한 신춘문예 디카시 부문엔 2400여 편이 몰리기도 했다.
  
국립국어원 사전, 교과서에도 실려
 

사진과 시가 만난 디카시가 인기다. 단행본 『세상에 하나뿐인 디카시』 (북투데이)에 실린 작품들.

디카시는 일선 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다. 2018년 서동균 시인의 ‘봄’이 각각 중학교(미래엔)·고교(천재교육) 검정 국어 교과서에, 지난해 윤예진 학생의 ‘기다림’이 고교 교과서(창비 『언어와 매체』)에 게재됐다. 올 대진대 인문예술대에는 ‘디지털 미디어와 디카시’ 교과목도 신설됐다.
 
서동균의 ‘봄’은 정겹고 귀엽다. 서 시인은 콘크리트 바닥에 모여 앉아 손가락으로 벌레를 가리키는 꼬마 셋을 찰칵 찍고, 그다음에 이런 시구를 달았다. ‘쉿!/봐봐. 움직이잖아/꿈틀꿈틀/개똥쑥 같은 그늘에서/초록 햇살을 품고 가는 애벌레야.’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질 듯하다.
 
디카시는 기존의 ‘포토 포엠’과 결이 다르다. 이미 완성된 시나 사진에 별도의 사진이나 시를 붙이는 포토 포엠과 달리 디카시는 시인이 직접 시적 형상을 찍고 글을 짓는 방식이다. 순간의 감흥을 사진과 시로 동시에 풀어내는 멀티 예술에 가깝다.
 
가장 특기할 사항은 문학의 장벽 낮추기다. 누구나 큰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다. 콘텐트가 부족한 지역 문화행사로도 인기다. 충북 보은의 오장환디카시공모전, 경남 하동의 이병주디카시공모전, 경기 양평의 황순원디카시공모전 등이 열리고 있다. 한명희 시인(강원대 교수)은 “디카시는 이제 겨우 싹을 틔운 단계지만 웹소설처럼 문단이란 제도권을 거치지 않고도 독자들과 얼마든지 소통할 수 있다”고 말했다.
 
물론 숙제도 있다. 디카시는 아직 문학의 외곽지대에 머물러 있다. 한국시의 한 장르로 단단한 뿌리를 내리려면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오민석 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는 “아직 많은 디카시들이 사진 설명 수준에 머물러 본격 문학이라 부르기엔 한계가 있다”며 “사진도 사진이지만 시작(詩作)에 대한 보다 진지한 성찰과 사색이 요청된다”고 평가했다.
 
최광임 시인은 “초창기에는 ‘시를 죽이는 방법도 가지가지’라며 반응이 썰렁했지만 최근에는 중견 시인들도 참여하고 있다”며 “미국·중국·인도 등 외국에도 활발히 소개되고 있어 일본의 하이쿠(俳句)처럼 한국시·한글의 세계화에 기여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대중화 탄력 받은 디카시, 문학 한류 이끌 것

이상옥

“올해는 디카시 보급의 새로운 원년이 될 겁니다.”
 
전화로 들려오는 이상옥(63·사진) 시인의 목소리는 밝았다. 이 시인은 디카시의 원조로 꼽힌다. 2004년 그가 개인적으로 실험한 디카시는 이제 한국 시단의 주요 흐름 중 하나로 성장했다. 올 9월께 한국디카시인협회·국경없는디카시인회가 정식 발족할 예정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창립총회가 두 달가량 연기됐다.
 
“미디어 변화에 따라 시도 끊임없이 진화해왔습니다. 디카시가 지금처럼 하나의 장르가 될지 예상하지 못했어요. 사진과 시의 결합은 디지털 시대에 가장 어울리는 형식입니다.”
 
디카시는 ‘공룡의 고장’ 경남 고성에서 고고성을 울렸다. 16년 전 창원시 창신대 재직 시절 이 시인이 출퇴근길에 한두 수씩 올린 게 지역을 넘어 전국, 나아가 세계 곳곳으로 퍼졌다. 그는 고성문화원에 디카시연구소를 차리고, 이후 뜻을 함께하는 문인들과 디카시 운동을 펼쳐왔다.
 
이 시인은 디카시의 해외 보급에도 힘써왔다. 2016~2018년 중국 허난성(河南省) 정저우(鄭州)경공업대 한국어과에서 디카시를 가르쳤다. 올봄부터 베트남 메콩대에서 강의할 계획이었으나 코로나19로 현재 늦춰진 상태다.
 
“스마트폰으로 세상이 촘촘하게 연결된 시대입니다. 디카시는 세계적 보편성을 확보한 장르가 됐어요. 한국에서 시작한 만큼 외국에 더 열심히 알려야죠. 문학 한류의 전령이 됐으면 합니다.”
 
박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