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 이후 봉쇄돼 버려졌던 체르노빌 주변 지역을 최근 산불이 휩쓸고 있다.
이번 산불은 지난 3일 시작됐다. 비가 내리면서 한 차례 불이 꺼지는 듯했으나 강한 바람에 다시 살아나 26일 현재까지도 타고 있다. 위성사진에서 체르노빌 인근 제한구역 밖은 물론이고 제한구역 안까지 불이 계속 타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체르노빌 주변 방사능 오염 우려
그린피스 러시아 사무소는 지난 13일 “체르노빌 제한구역이 생긴 이래 가장 큰 산불이 발전소 주변까지 태우고 있다”며 “오염구역 상층 흙에 섞인 방사능 물질이 대기 중으로 흩어질 수 있어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20일까지 체르노빌 주변 제한구역 안에서 면적의 22%에 달하는 약 5만 7000헥타르(ha)가 불에 탄 것으로 그린피스 러시아 사무소는 추정했다.
그린피스 독일 사무소의 수석 방사선 전문가인 하인즈 슈미탈은 24일 화상인터뷰에서 “아직 오염이 많이 남아있는 제한구역 내 산불로 얼마나 많은 방사능이 공기 중으로 방출됐을지 아직 모른다”며 “체르노빌 주변의 고농도 지역에서 불로 방출되는 방사능의 총량은 1979년 미국 스리마일 원자력발전소 사고 당시의 방사능과 유사한 수준일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다만 넓은 지역에 퍼지기 때문에 다소 희석되면서 한 지역에 퍼지는 방사능 농도는 낮다”면서도 “고농도 오염이 남은 제한구역에 10번 들어가는 것보다 화재 현장 한 번이 더 위험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화재는 가라앉아있던 방사능 낙진을 강력하게 퍼뜨린다”고 말했다.
안전장치 끄고 실험 중 폭발한 원전
정상 출력의 10배가 넘는 에너지가 한꺼번에 만들어지면서 원자로의 콘크리트 천장이 날아갈 정도의 폭발이 일어났고, 내부에서 불이 타면서 500경~1200경 ㏃(베크렐, 방사선량을 측정하는 단위)의 방사능 물질이 우크라이나를 넘어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분류하는 원전 사고 중 가장 심각한 ‘7등급’으로 분류됐다. 이 사고로 노심 약 200t(톤)이 녹고 그 중 약 5%인 10t 분량의 방사능이 유출됐다고 그린피스 독일사무소는 추산하지만, 원전 안에 있던 방사능 물질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어 추산일 뿐이다.
하인즈 슈미탈은 “사고 직후 원전 근처의 숲에서 측정한 방사능은 60~200Sv(시버트)까지 측정됐다”며 “치사선량의 20배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2020년 현재 IAEA가 정하는 1인당 연간 노출 방사선량은 1mSv 이하다. 200Sv는 1년 노출 최대치의 20만배에 달한다. 화학적으로 측정 가능한 무거운 방사능물질 외에 공기 중으로 쉽게 날아가 버려 측정이 어려운 제논, 세슘 등 다양한 방사성 물질이 섞여 있기 때문에 실제 노출되는 방사선의 양은 측정치보다도 더 높을 수도 있다.
핵 물질 유럽 퍼져…“구소련 몰락 도화선”
사고 이후 수습할 방법은 뚫린 지붕을 콘크리트로 덮는 방법밖에 없었다. 망가진 원자로를 덮을 콘크리트 석관은 체르노빌 외부에서 만들어 가져왔다. 너무 강한 방사능이 뿜어져 나오는 탓에 인근에서 만들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폭발 잔해뿐 아니라 수습 작업 과정에서 생기는 방호복, 장비, 헬리콥터, 모든 게 방사능 폐기물로 분류됐다. 이 폐기물들은 체르노빌 곳곳에 매립됐다. 하인즈는 “체르노빌 원전 10㎞ 반경에 폐기물 매립지가 800개 넘게 있고, 독일의 1년 치 핵폐기물 양의 15배가 묻혀있다”며 “큰 매립지는 방호조치를 잘해놨지만, 마구잡이로 묻어놓은 작은 매립지들에 화재가 번진다면 고농도 방사능이 퍼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1986년 덮은 콘크리트 석관은 노후화로 약해질 우려가 있어, 2016년 석관 위에 또 새로운 석관을 만들어 덮었다. 이 석관도 수명이 30년이다. 하인즈는 “석관은 문제를 덮어놓을 뿐이고, 안의 원자로와 방사능 폐기물을 꺼내 해결해야 하는데 현재 인류는 그럴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체르노빌 이전에 가장 큰 원전 사고는 1979년의 미국 펜실베니아 주 ‘스리마일 섬 원전사고’다. 1979년 3월 28일, 원전을 식히는 물 공급이 끊어지면서 원자로 중심의 핵연료(노심)가 절반 이상 녹아내렸다('멜트다운'). 멜트다운으로 외부에 방사능이 유출된 '5등급' 사고로 분류된다. 냉각수를 금방 다시 공급하면서 방사능 유출이 적어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미국이 한동안 ‘원전 건설 전면 중단’을 선언하게 된 계기가 됐다.
가장 최근 일어난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스리마일과 같은 원리로 발생했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의 여파로 발생한 쓰나미가 해안가에 위치한 후쿠시마 원전을 덮쳤다. 당시 발전소의 전기가 끊긴 데다 비상 발전기도 작동하지 못하면서 원자로를 식히지 못해 결국 원자로 3기가 녹았다. 역사상 두 번째 ‘7등급’ 원전 사고다.
“체르노빌 사고, 원전 신화 깬 사건”
하인즈는 “전 세계 핵 산업계가 해결책을 찾으려 했지만 유일한 방법은 ‘시간을 벌기 위한’ 석관을 덮는 것뿐이었다”며 “그러나 덮어두고 가둬두는 건 완전히 방사능을 없애진 못한다. 방사능은 아직 완벽한 해결책은 없고 차악의 선택지만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린피스 서울사무소 장마리 캠페이너는 "체르노빌 사고는 '원전 신화'를 정면으로 깬 사건"이라며 "원전과 관련해서는 늘 정확한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에 이번 체르노빌 화재를 통해 생길 건강피해도 예상만 할 뿐 정확한 수치를 얻기는 어렵다. 방사성 피해는 사고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고,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연 기자 kim.jeongyeon@joongang.co.kr